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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vis Feb 18. 2019

기계지옥에서 태어난 천사,따뜻하고 강인한 전사가 되다

<알리타:배틀엔젤>과 <총몽>을 보고

※주의: 이 글에는 <알리타:배틀엔젤>과 <총몽OVA>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알리타:배틀엔젤>(이 글에서는 이하 <알리타>라고 칭함)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알리타>는 1990년대 일본의 만화 시리즈인 <총몽>을 실사화한 영화이다. 이전에도 할리우드에서 일본의 원작 만화를 실사화한 경우는 꽤 있었다.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이 최근의 사례이다. 하지만 대다수가 원작에 한참 못 미친다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알리타는 다르다.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대체로 원작의 방대한 세계관을 잘 요약했고 거기에 화려한 CG와 액션신이 가미되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필자도 이 평가에 동의한다.

일반적인 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간 관객들은 영화에 실망했을 듯하다. 스토리에 개연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타>는 '총몽'이라는 SF물의 철학적 성격을 계승한 SF영화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을 염두해서인지, 사전에 <총몽OVA>를 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스토리 진행에 큰 불만이 없었다. 원작 만화를 본 관객들도 나와 비슷했으리라 추측한다. 만약 영화를 아직 안 봤으나 보러 갈 예정이라면 1시간짜리로 제작된 <총몽OVA>를 한 번 보는 걸 추천한다. 핵심 줄거리가 거의 같기 때문에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원작 만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은 <알리타>와 <총몽OVA>(이하 <총몽>이라고 칭함)만을 본 이후의 감상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알리타>와 <총몽>의 시간 배경은 2563년이다. '대추락'이라는 사건 이후 세상은 공중도시 '자렘'과 자렘에서 나오는 고철 쓰레기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고철도시'로 나뉘었다. 고철도시의 시민은 대부분 자렘에 가지 못한 빈곤층이나 자렘에서 추방당한 이들로 인간과 사이보그가 혼재한다. 고철도시는 자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팩토리'라는 중앙기관이 관리한다. 팩토리는 치안부터 시작하여 고철도시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고 있다. 동시에 고철도시 최고의 이벤트인 모터볼 경기에 개조 사이보그를 내보내고 사이보그를 만들기 위해 암시장을 조종하는 등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고철도시와 도시의 시민들은 오직 자렘만을 위해 존재한다. 쓰레기더미에서 선별되어 다시 정제된 부품들과 각종 식량 등 그들이 노동한 결과물들은 전부 연결관을 통해 자렘으로 올라간다. 주민들도 모두 위풍당당하게 떠있는 자렘을 우러러보며 자신도 언젠가 저기에 가겠다는 꿈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도는 달랐다. 딸의 병 때문에 자렘에서 추방당한 이도는 자렘에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고철도시에서 후한 인심을 가진 사이버닥터로 살고 있었다. 허구한 날 돈이 없는 환자들은 무료로 치료해 준 탓에 이도는 의사인 동시에 도시 내 치안을 관리하는 헌터워리어가 되어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부품을 찾고 있던 이도는 기적적으로 뇌가 아직 살아있는 사이보그를 하나 발견하여 치료해주고 '알리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총몽>과 <알리타>의 스토리 진행은 거의 같다. 하지만 <알리타>에는 설정이 하나 추가되었다. 바로 알리타의 정체이자 힘의 원천이다. 알리타는 300년 전 자렘의 최고 권력자인 '노바'에 대항하던 조직인 'URM'에서 만든 최강의 광전사형 사이보그 중 하나였다. 격렬한 전투가 진행되던 도중 URM은 무너지고 URM의 사이보그들도 전멸했으나 알리타는 운 좋게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이다. 영화에서는 URM이 화성연합공화국이고 우주 탐사 등의 임무도 수행했다는 설정도 나왔는데 개인적으로 필요 없는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후속편을 위한 떡밥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관객이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에 혼란을 줄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총몽>에는 없어서 답답했던 알리타의 정체에 대한 설정이 추가된 점은 매우 좋았다. 이렇게 약간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나 작품이 품고 있는 철학은 동일하다. '진정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정의할 수 있을까?'

<알리타>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이러하다. 기억을 잃은 알리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비록 사이보그이기는 하나 알리타는 영화에 나오는 어떤 인물보다도 인간적이다. 이 모습을 처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알리타와 이도의 관계이다. 이도는 처음에 알리타가 예전에 잃은 자신의 딸의 역할을 대신해주기를 원했다. 딸의 이름이었던 '알리타'를 그대로 지어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쉽게 말해, 자신의 딸처럼 10대 소녀의 뇌를 가진 이 사이보그를 자식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기억을 잃은 알리타는 이도가 주는 '이도의 딸'이라는 정체성을 넙죽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받는 편이 속 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그 정체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였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고민하고 찾고자 노력한다. 알리타가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필자는 인간의 사춘기 모습이 연상되었다. 우리도 중, 고등학생 때 한 번씩은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뭐하면서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탐색해보고 '나는 누구인가?'와 같이 쓸데없이 철학적인 고민도 해보고 왠지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기 싫고 내 마음대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지 않았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현재 진행형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때를 회상 중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구라도 그 시간이 인간으로서, 어른으로서 성장하는 기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리타는 비록 기계이지만 영화 내내 여느 인간들처럼 인간적인 기간을 거치고 성장한다. 그 결과 초반부에 초콜릿을 제일 좋아하던 순수한 10대 소녀는 후반부에 누구보다 강한 가치관과 자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전사가 된다. 처음에는 그녀를 통제하던 이도도 중반부부터 그녀의 생각과 정체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두 인물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아름다운 부녀로 거듭난다.      

영화가 끝난 직후 대부분의 관객들이 아마 '응? 이게 끝이야????'와 같은 반응을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봐도 결말이 좀 허무해 보이긴 했다. 마침내 자신의 기억을 모두 되찾은 알리타는 모터볼경기에서 챔피언이 되어 자렘으로 가려고 한다. 알리타의 목적은 URM의 최후의 생존자로서 자렘의 지배자 노바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체 자렘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고철도시의 모든 사람들은 자렘을 우러러보지만 정작 영화 내에서 자렘에 대한 설명은 전무했다. 대체 자렘이란 무엇이고, 자렘에는 누가 사는 것인가. 필자는 어쩌면 자렘이 영화 속 세계의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만든 허상일 수도 있다고 상상해본다. 휴고와 시렌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오로지 자렘에 가겠다는 목표만으로 그토록 착취당하고 부정한 짓까지 저지르면서 팩토리와 백터에게 충성한다. 또한 합법적으로 자렘에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모터볼 경기에 목숨을 걸고 뛰어든다.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분명하고 갈 수 없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자렘이라는 허상과 그 허상에 대한 헛된 희망에 의해 도시의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아니면 자렘은 극도로 고도화된 기술과 시스템 아래 인간성이 완전히 말소된 도시일 수도 있다는 상상도 해본다. 자렘의 구멍에서는 매일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고철 쓰레기들이 쏟아지고 또 쏟아진 만큼의 기계부품들이 정제되어 연결관으로 올라간다. 그렇다면 자렘은 고철도시보다 몇 배는 더 기계화된 도시라는 뜻이다. 시스템이 기계화되고 고도화된 만큼 고철도시보다 훨씬 깨끗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는 있을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유대, 사랑, 정과 같은 감정은 사라지고 철저히 노바라는 절대권력 아래에서 시스템과 계급에 따라 움직이는 도시가 아닐까? 조지 오웰의 <1984>가 연상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개인적으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영화 속 자렘 유경험자인 이도와 시렌과 백터가 모두 자렘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시렌은 초반부에 어떻게든 자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터에게 충성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휴고와 알리타의 모습을 보면서 변심한다. 즉, 위에서 언급한 인간적인 감정에 굴복한 것이다. 백터 역시 천국의 개가 되느니 지옥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말하며 고철도시에서 계속 권력자로 군림하기를 원한다. 고철도시는 지옥일 수도 있지만 필자에게는 자렘이 고철도시보다 훨씬 심한 기계지옥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필자로 하여금 인간다움이라는 키워드로 알리타만큼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혼란을 주는 캐릭터가 있다. 휴고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총몽>을 본 이후 <알리타>를 보면서 꽤나 굴곡 있게 바뀌었다. <알리타>를 보기 전 <총몽>을 막 다 본 후에는 휴고가 인간적인 사이보그인 알리타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즉, 인간적이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휴고는 처음부터 자신은 돈을 많이 벌어 언젠가 반드시 자렘에 가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친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밤마다 길거리의 사이보그들로부터 부품을 절도하여 암시장에 매매하는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또한 자렘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백터와 위험한 관계를 유지하며 충성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자렘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터볼 경기에서 챔피언이 되는 것뿐이다. 즉, 휴고는 한평생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린 것이다. 그는 알리타와 인간적인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만 결국 그 관계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자렘으로 향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 모습을 보면서 휴고는 불가능한 희망과 시스템에 매몰되어 인간적인 관계와 삶을 포기한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휴고와의 사랑과 그와 함께하는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겼던 알리타와 비교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리타>까지 본 지금은 휴고가 오히려 불완전하고 모순된 인간성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든다. 두 영화에서 휴고라는 캐릭터가 다르게 묘사된 것은 아니다. 아마 애니메이션으로 본 후에 실제 사람이 연기하는 실사영화를 보다 보니 좀 다르게 와 닿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고가 그토록 자렘을 갈망했던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그는 그저 한평생 고철도시에서 자렘을 올려다보기만 하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위에서 고철도시를 내려다보는 풍경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대단한 사치와 유흥을 부리지 않더라도 이 더러운 마을을 벗어나 약간 더 잘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렘을 평생의 꿈으로 여기다 죽은 형을 대신해서 한 번 가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휴고가 자렘으로 가려는 목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돈을 벌고 공부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왜 고생해서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있는가? 거창한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냥 좀 더 나은 곳에서 살고 싶기에, 좀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싶기에, 만약 결혼을 하여 가정이 생긴다면 좀 더 좋은 곳에서 자식을 키우며 살고 싶기에 지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약간 더 잘 살고 싶은 것, 그 정도이다. 그 정도를 위해서 우리도 연애, 휴식, 여가 등 무언가를 포기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걸 쟁취하며 살아갈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휴고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알리타와는 다른 방면으로 좀 더 현실적인 인간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의미에서 알리타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헌터워리어들이다. 알리타가 보여주는 것이 선한 인간성이라면 헌터워리어들이 보여주는 것은 악한 인간성이다. 도시 내에서 헌터워리어들의 역할은 경찰의 대체자이다. 도시 내 경찰이라는 조직이 사라졌기 때문에 팩토리가 치안을 위해 고용한 사설경찰쯤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에게 필요한 정의감, 희생정신 등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알리타가 헌터워리어로 막 등록한 후 그들 모임에 찾아갔을 때 잠깐 멍하니 있던 관객들은 저게 헌터워리어들인지 조폭 집단인지 분간이 안 됐을 듯하다. 언뜻 보면 이제 합법적으로 범죄자들을 체포할 수 있게 된 알리타가 범죄자 소굴로 들어가 도장깨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실제로도 도장깨기 하기는 했다) 지저분해 보이는 외관만큼이나 성격 또한 매우 속물적이고 고지식하다. 좀 더 높은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를 잡기 위해 서로끼리도 치열하게 경쟁하며 위계질서도 매우 엄격하다. 그리고 현상금이 걸리지 않은 범죄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강화된 그류시카가 알리타를 죽이러 나타났음에도 헌터워리어들은 현상금이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외면한다. 알리타가 진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와준 인물은 이도와 휴고를 제외하면 개 주인 사이보그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의감이나 동료의식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던 듯하다.

게다가 헌터워리어들은 돈을 위해 본인들이 규칙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르는 행동 또한 서슴지 않는다. 백터에게 일시적으로 고용된 헌터워리어들은 알리타를 죽이라는 의뢰를 받고 모터볼 경기에서 규칙을 어겨가며 그녀를 죽이려고 든다. 자팡은 휴고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면서 알리타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헌터워리어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이라고 다 악한 것도 아니고 사이보그라고 해서 다 선한 것도 아니다. 그런 것에 관계없이 개인이 어떤 사람이 되는지는 그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인간성의 한 단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이든 사이보그이든 상관없이 알리타는 어떤 인물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었다.



<알리타:배틀엔젤>은 화려한 액션 영화로서 풍부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동시에 영화를 본 관객에게 어느 정도 여운과 생각할 여지를 주는 SF영화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리 가볍지는 않은 액션 영화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인류의 문명이 26세기에 정말로 저런 모습으로 변해있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슬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모두가 잘 생계 걱정 없이 잘 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이 세상에 대해 마음껏 사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재 인간이 지향하는 발전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속 세상은 그런 거 없이 야만적이고 불평등하다. 우리의 후손이 저런 고철도시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면 슬프지 않은가? SF물을 좋아하지만 아직 많이 보지는 않은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 다양한 작품을 접하면서 이 글에 적은 것처럼 여러 상상을 해보는 것도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리타>의 후속편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 <알리타>와 같은 유형의 이전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온다면 분명 기대해 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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