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rvis Mar 05. 2019

내가 인간임을 결정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다

SF 명작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2년 전, <블레이드 러너 2049>(이하, <2049>)의 제작이 확정되었을 당시에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불후의 명작인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이 35년 만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평단의 반응은 호불호가 갈렸고 전반적으로 전편보다는 못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2049>가 <블레이드 러너>의 메시지와 스토리를 잘 이어받았고 전편만큼이나 뛰어난, 즉 동급이라도 해도 될 만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블레이드 러너>와 <2049>의 시간차가 무려 30년이나 되기에 작중 세계관에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드니 빌뇌브 감독은 그 사이 있었던 일에 대한 영상을 따로 제작하여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했다. <블레이드 러너 2022, 2036, 2048> 각각 3개의 영상으로 이 3개를 봐야 영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2019년 이후 타이렐 사는 수명이 4년뿐이었던 넥서스6 대신 수명 제한마저 없애버린 넥서스8을 개발한다. 하지만 2020년 들어서 태동한 인간 우월주의 운동으로 인해 리플리컨트 생산이 중단되고 타이렐 사는 파산한다. 2022년, 넥서스8 모델들은 종족의 전멸을 막기 위해 네트워크를 해킹하여 EMP 폭탄을 LA에 떨어뜨리는 작전을 실행한다. 작전은 성공하고 열흘 간의 대정전으로 인해 모든 전자 데이터베이스가 삭제된다. 이제 리플리컨트의 오른쪽 눈 아래 일련번호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구별할 방법은 없게 되었다.

한편 농업혁명으로 세계경제의 대부호로 떠오른 니안더 월레스는 타이렐 사의 기술을 부활시켜 신형 리플리컨트를 제작한다. 인간처럼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했던 이전 모델들과는 달리 신형 모델은 인간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인간에게 이상적인 노예이다. 혹시라도 복종하지 않으면 그 즉시 처분된다. 이 신형 모델들은 완전한 노예로서 인간이 하면 위험한 일들을 대신한다. 그들 중 일부는 남아있는 넥서스8들을 수색하고 처분하는 일을 한다. 그들이 바로 이번 영화의 '블레이드 러너'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어느 '평범한 리플리컨트'였던 블레이드 러너 K의 이야기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에서 추구하는 메시지를 훌륭하게 계승했다. '인간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등과 같이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메시지들을 말이다. 놀라운 점은 <2049>는 전작보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망이 훨씬 촘촘하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스토리라인과 줄거리가 전작보다 약간 더 복잡해졌고 관객들이 이해하기 힘들거나 지루하다고 느낄만한 부분도 생겼다. 하지만 그 관계망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잘 이해하면 절대 <2049>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감독은 잘 드러나지 않았던 '자유'라는 요소를 추가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더 깊은 고찰을 하도록 만든다. 이 글에서는 '자유'를 중심으로 <2049>에 대해 논할 예정이다.


자유는 인간이라면 누릴 수 있고 보장받아야 하는 중요한 권리이자 인간성 중 하나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중요한 이유는 본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본인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현실에서 '워라밸'이라는 키워드가 부상하는 이유와 대기업에 취업한 사람들이 회의감을 느껴 퇴사하는 현상 등 많은 사회문제의 원인은 자유가 박탈된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스템의 수많은 소모품들 중 하나일 뿐이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 자유는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한다. 전작에서 리플리컨트들의 자유를 표현하는 장치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따로 논할 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2049>에서는 리플리컨트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핵심 수단으로 자유가 사용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의 주제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주제가 처음 제시되는 부분은 도입부에 사퍼와 K의 대결 장면이다. 넥서스8인 사퍼와 넥서스9인 K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유의지의 유무이다. 넥서스8은 외관뿐만 아니라 수명,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인간과 같다. 반면 넥서스9는 나머지는 다 같으나 자유의지가 없고 인간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설계된 노예이다. 그렇기에 K는 자신이 리플리컨트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LAPD로서 국장의 명령만 따르며 기계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사퍼는 스스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꾸준히 철학, 종교 관련 도서를 읽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왔다. 그런 사퍼는 죽기 직전까지 넥서스9를 인간의 밑이나 닦는 존재라고 일컬으며 혐오한다. 그리고 너희들은 기적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망한다.

그가 말한 기적이란 리플리컨트 간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를 의미했다.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구분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인 생식능력의 차이가 사라진 것이다. 리플리컨트가 자생적으로 번식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더 이상 인간에게 종속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데커드와 레이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조시 국장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가 급격하게 혼란스러워질 사태를 우려한다. 그래서 사실을 은폐하고 K에게 아이를 찾아내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아이에 대한 단서를 찾을수록 K는 혼란에 사로잡힌다. 사퍼의 집 앞 나무에 적혀있던 숫자와 자신의 생일이 일치한다는 점, 그 날 태어난 유전자가 같은 두 명의 아이 중 남자아이가 사라졌다는 점 그리고 목마와 관련된 그의 어릴 적 기억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점 등 여러 정황들이 K가 그 아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여느 평범한 리플리컨트가 아니라 실제 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아주 특별한 아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K를 크게  변화시킨다. 그에게 리플리컨트의 복종 본능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진실을 알기 위해 데커드를 찾아간 K는 대화 중 월레스의 비서인 러브에게 습격을 당한다. 잡혀가던 도중 그는 프리사가 이끄는 넥서스8 집단의 마리에트에게 구출되고 프리사는 K에게 자신이 일으키려는 혁명에 동참하라고 권한다. 동시에 그녀는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준다. 그 날 데커드와 레이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여자라는 사실, 즉 K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프리사는 자신들의 존재가 월레스에게 발설되지 않도록 K에게 데커드를 죽일 것을 명령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옳은 일을 위해 동족의 목숨도 주저 없이 희생하는 존재들이었다. 옳은 일을 위해 죽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K는 데커드를 죽이지 않는다. 또한 프리사의 집단에 합류하지도 않는다. 그는 러브에 의해 잡혀가던 데커드를 구하고 딸에게 데려다준 후 죽음을 맞이한다. 넥서스8 집단에 들어가면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유는 이미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한 것이다. 프리사가 아닌 'K가 생각한 옳은 일'이란 데커드를 그의 자식과 만나게 해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리플리컨트로서 넥서스8 집단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리플리컨트로서'는 말이다. 최소한 그 집단의 리플리컨트들에게는 옳은 일이다. 하지만 K는 리플리컨트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더 이상 어느 평범한 리플리컨트이고 싶지 않았다. K는 조이처럼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유전적으로 자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데커드였다. 그가 자신이 진짜 아이라고 생각했을 때 데커드를 찾아간 이유는 아버지를 직접 만나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인간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비록 이제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딘가에 있을 진짜 아이 역시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K는 목숨을 걸고 데커드를 애나가 있는 곳에 데려다준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데커드가 건물 안에 들어간 후 눈을 맞으며 계단에 누워있는 K는 비록 죽어가고 있었지만 리플리컨트로 살아있었을 당시에 어느 때보다 특별한 인간이었다.

K뿐만 아니라 데커드도 자유의 형태로 자신이 인간적인 리플리컨트임을 보여준다.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잇는 연결고리인 데커드는 개인적으로 두 영화를 통틀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인간에 가까운 리플리컨트라고 생각한다.

전편에서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일 수도 있다는 장치가 있었지만 그의 정체가 오피셜로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2049>가 개봉하면서 감독은 데커드가 리플리컨트가 맞다고 확실시했다. 즉, 유니콘과 관련된 떡밥이 모두 사실이었던 셈이다. 또한 2019년에 데커드는 레이첼과 마찬가지로 로이의 성능을 뛰어넘는 신형 리플리컨트였던 셈이다. 아마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라는 기억이 주입된 리플리컨트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데커드는 넥서스6 모델들을 정확하고 빠르게 포획할 수 있는 신체능력을 갖췄고 수명 제한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리플리컨트를 추구했던 타이렐 회장의 마지막 기술인 '생식'이 적용된 유일한 리플리컨트였다. 레이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049>에 짧게 등장한 가프의 대사를 통해 가프 역시 그 당시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임을 알고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기정 사실화되었다.

데커드의 자유의지는 월레스와의 대면 장면에서 드러난다. 월레스는 데커드에게 당신과 그녀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말해준다. 애초에 데커드는 레이첼과 만났을 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당신이 레이첼을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닌 수학적 정확성의 성공적인 결과에 불과하다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녀와의 사랑이 진짜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한 기계적인 결과라는 사실은 데커드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데커드라고 생각해봐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큰 회의가 밀려올 거라고 생각한다. 충격에 빠진 데커드에게 월레스는 어떤 선물을 주며 협조를 요구한다. 그 선물은 바로 복원한 레이첼이었다.

만약 그와 레이첼의 사랑이 몇 번이라도 같은 인풋을 넣으면 같은 아웃풋이 나오는 수학적 정확성이라면 레이첼과 재회한 데커드는 월레스에게 굴복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커드는 굴복하지 않았다. 레이첼을 거부했다. 이는 데커드 자신이 기계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시에 그가 그때 만난 그 레이첼과 정말로 사랑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장면이다. 이런 복원된 가짜로는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데커드의 인간적인 감정과 자유의지가 수학적 정확성을 이긴 장면인 동시에 영화에서 월레스가 유일하게 당황하는 장면이었다. 데커드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리플리컨트를 넘어서 진짜 인간이 되었다. 이 모든 걸 위에 이미지에 있는 하나의 대사로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고 듣자마자 머리에 탁 꽂힌 대사이다.


이번 글에서 다룬 내용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새롭게 다뤄진 '자유'라는 키워드이다. 기존에 <블레이드 러너>에서 다뤄진 인간성에 대한 메시지와 장치들 또한 <2049>에서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내용이 거의 겹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 따로 다루지 않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9년, 아슬아슬한 진실 위를 달리는 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