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_ 김효선
디자인은 별 무리 같다. 하나의 큰 별인 줄 알고 다가가 보면 그래픽, 패션, 패키지, 로고, 제품 디자인 같이 무수히 빛나는 별들로 이루어진 세계. 7년 동안, 이 별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활약하고 있는 이가 있다. 패션 디자이너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그리고 패키지 디자이너에서 아트 디렉터로. 쉽지만은 않았을 새로운 일들에 계속 도전하며 나아가는 그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디자인이라는 커다란 세계 안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뿜어내며 부단히 나아가는 디자이너, 김효선을 만났다.
유보라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김효선 안녕하세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7년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김효선입니다. 지금은 발달장애인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그들과 협업하는 사회적 기업 '키뮤스튜디오'에서 아트 디렉터로 지내고 있고요.
유보라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김효선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거의 삶의 일부였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온스타일에서 방영한 패션 디자이너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에 홀딱 빠졌어요. 그리기와 만들기를 모두 좋아했던 저에게 패션 디자인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의 완벽한 조합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대학생 때 미국에 있는 패션 디자인 회사의 인턴으로 디자이너로서의 첫 발걸음을 뗐습니다.
유보라 꿈을 일찍 이루셨네요. 그런데 첫 직장 생활을 미국에서 시작하셨다니, 녹록지 않았을 것 같아요. 미국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김효선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드라마 ‘하이 스쿨 뮤지컬’을 보고 컬처쇼크를 받았어요. 아니, 쟤네는 고등학생인데 사복도 입고 뮤지컬도 하네?! 그때 미국 문화에 매료되어서, 그곳에서 일하며 살겠단 다짐을 했어요. 물론 쉽진 않았죠. 비자를 받는 것부터가 어려운 과정이었거든요. 영어를 잘 못하고 부유하지도 않아서 비자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무조건 미국에서 일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어요. 인턴 비자를 받았던 순간의 감정을 지금도 기억해요. 벅찬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화해 울었어요. 엄마도 우시더라고요. 대구의 한 여자아이를 지금의 김효선으로 만들어준 잊지 못할 ‘시작’이에요.
유보라 패션 디자인 업무는 어땠나요? 상상한 대로였나요?
김효선 실은 아이러니했어요. 자유롭게 창작하고 싶어서 패션 디자인을 선택한 건데, 인체의 한계나 소재의 한계로 막상 저에겐 패션 디자인이 창작력을 제한하는 직무가 된 거예요. 그런데 마침 3개월 정도 일했을 때, 회사에서 이커머스팀을 확장하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온라인 광고나 배너 등을 디자인할 디자이너가 필요해졌고, 포토샵을 다룰 수 있던 제가 그 팀에 소속되어 그래픽 디자인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래픽 디자인은 패션 디자인보다 덜 제한적이어서, 일하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유보라 미국에서 일을 이어나가고 싶으셨을 텐데,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김효선 미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여전해요. 그렇지만 귀국할 당시엔 여건이 좀 어렵기도 했고, 워킹홀리데이 같은 새로운 걸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귀국 후에 워킹홀리데이는 못 갔지만, 대신 다른 디자인 업무를 경험했어요. 패키지 디자이너로 4년을 일했죠. 코스메틱 회사에서요.
유보라 네? 이번엔 그래픽 디자인이 아니라 패키지 디자인이라고요?
김효선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디자인’과 ‘만들기’의 조합이었잖아요. 패션 디자인을 시작한 이유와 똑같아요. (웃음) 제가 일했던 곳은 한국과 중국에 있는 코스메틱 회사였어요. 그래서 4년 중 3년은 중국에서 보냈죠.
유보라 다양한 일을 다양한 장소에서 해오셨네요. 그런데 '일'에는 '소통'이 중요하잖아요. 중국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김효선 그렇죠. 패키지 디자인은 특히나 후가공 같은 작업이 필요해, 공장과의 소통도 원활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중국어를 할 줄 알아서 중국으로 간 건 아니었거든요. 중국어를 못했고 패키지 디자인도 알아가는 단계인 데다가 사수도 없었지만, 일단 간 거예요. 그냥 부딪힌 거죠. 원하는 디자인의 패키지를 만들고 싶으면, 필요한 후가공이 반영된 화장품 패키지를 직접 사서 공장 사장님에게 보여주곤 했어요. 이전보다 일이 두 배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힘을 그때 얻었다고 생각해요. 중국에 다녀온 후론 뭘 해도 겁이 안 났거든요. 나 이젠 진짜 두려울 게 없다,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유보라 저 같은 성격의 사람은, 조금 엄두가 안 나는 삶인데요? 하하.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었나요?
김효선 하나는 ‘열심히 살자’라는 저의 신조고요, 또 하나는 ‘배드민턴’이에요. 저는 항상, 이왕 할 거 열심히 하잔 생각을 해요. 금수저가 아니니까. (웃음) 어차피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할 텐데, 그렇다면 진짜 열심히 하고 진짜 잘 하자란 생각을 늘 했어요. 그리고 배드민턴은 제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운동이에요.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배드민턴 클럽에 가입해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곤 했어요.
유보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배드민턴이었군요. 효선 님 배드민턴 엄청 잘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김효선 고등학교 1학년 때 재미없는 야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이런 교내방송이 나오는 거예요. 배드민턴부 회원을 모집하는데, 대회 기간에는 야자를 빼준다고. 옳다구나 하고 배드민턴부에 가입했죠. 그러다 2학년 때, 공유를 닮은 체육 선생님이 배드민턴부를 맡게 되신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열심히 연습했어요. 하하. 저녁 먹을 시간에 강당에 가서 공으로 벽치기를 1시간씩 했어요. 매일요. 공부는 그렇게 안 되던데, (웃음) 배드민턴은 열심히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게 보여서 더 재밌게 했죠.
유보라 공유를 닮은 선생님이라니... 여러 모로 납득이 가네요. (웃음)
김효선 다음 생애가 있다면, 꼭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싶어요. 금메달이라는 목표 하나를 위해 살아보고 싶거든요.
유보라 디자인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신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김효선 본격적으로 ‘아트워크’와 관련된 회사에서 일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 지금 소속된 디자인스튜디오 '키뮤'에 지원했고, 지금까지 아트 디렉터로 일해오고 있어요. 발달장애인 디자이너들을 교육해 디자인 소스들을 받고, 그것들을 잘 다듬어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있어요.
유보라 패션 디자이너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또 패키지 디자이너에서 아트 디렉터로. 어떻게 보면 효선 님의 커리어가 물 흐르듯 흘러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효선 운도 없지 않아 있었겠죠? 그렇지만 이게 다 제가 계획했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창작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워낙 커서, 저의 모든 선택이 그 열망을 따라갔던 거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디자인 말고 다른 건 아예 생각을 못 했던 거죠.
유보라 새로운 분야에서 빨리 능숙해지기 위해 노력도 많이 하셨을 텐데.
김효선 물론이죠. 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맞닥뜨렸을 땐 먼저 이 일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지 생각해봐요. 잘하고 있다는 확신은 일에 대한 흥미로 이어지고, 흥미는 또 자연스레 열정으로 바뀌거든요. 열정이 생긴 다음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하고요. 그러면 어느 순간 뒤처지기는커녕, 오히려 리드하는 위치에 서게 되더라고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옛말이 정말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실감할 때가 많아요.
유보라 감사하게도 오늘 인터뷰를 위해 멋진 작품을 가지고 와주셨네요. 설명을 해주신다면?
김효선 제가 타코를 엄청 좋아해서 곁들여 먹는 살사소스도 곧잘 만드는데요. 토마토, 양파, 고수, 레몬즙만 섞어도 되게 맛있는 살사소스가 돼요. 그런데 어느 날 살사소스를 만들고 있는데, 살사소스가 뭔가 라코스테 컬러 같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라코스테 악어가 늪을 헤엄치듯 살사소스에서 헤엄치면 재밌겠단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만들게 된 작품이에요. 제목은 <살사를 사랑한 라코스테>입니다.
유보라 재밌네요. 스토리가 참 위트 있어요. 효선 님의 세계관 내지는 작품관이 궁금해지는데요?
김효선 특별한 작품관이 있진 않아요. 그냥 모든 디자인이 다 재밌어요. 오래전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에 빠졌을 땐, 거의 1년 동안 동양화만 그렸어요. 혼자 습작한 신윤복, 김홍도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했고요. 또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에 빠졌을 땐 아크릴화만 엄청 많이 그렸어요. 좋게 말하면 다 재밌어하고, 나쁘게 말하면 정체성이 없는 건데요. 저도 지난 1년 동안,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나만의 것은 뭘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왜 굳이 잘하는 거 하나를 찾아야 해? 그냥 다 해보면 되는데.’ 그래서, 제 세계관은 아주 얇고 넓답니다. 그 안에서 계속 재밌게 놀고 있는 중이에요. 요즘은 NFT에 도전 중입니다!
유보라 효선 님은 천성이 아티스트네요. 예전에 효선 님이 자신을 맥시멀리스트라고 표현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표현하신 건가요?
김효선 전 생각이 너무 많아요. 예를 들어 신상품을 기획하는 중이면, 택시를 타든 친구를 만나든 신상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요. 생각이 멈춰지질 않아서 스스로 지칠 때도 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어릴 때부터 강박장애가 좀 있었어요. 어떨 땐 결벽 강박 또 어떨 땐 불안 강박을 겪었는데, 끊이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상쇄하기 위해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시작했죠. 어릴 땐 진짜 힘들었어요. 가족도 다 힘들어하고요.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 생각을 바꿔본 거예요. ‘오케이, 예술가가 되려면 이 정도 문제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고요.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한 저 자신에게 놀라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어요.
유보라 학창 시절 제 친구가, 고통이 있어야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땐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어른이 되고 나니까,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고통을 통과해야만 만들어지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걸. 효선 님의 앞으로의 계획도 듣고 싶어요.
김효선 계획 짜는 게 세상 어려운 ENFP에게 너무 가혹한 질문인데요? 하하. 저에게는 인생 목표가 하나 있어요. 트렌디한 브랜드가 넘쳐나는 LA 멜로즈 거리에 저의 브랜드숍을 여는 것. 이 목표를 위해 생활신조를 세웠어요. 첫째, 정돈된 루틴을 만들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실행한다. 둘째, 일주일에 두 개 이상의 창작물을 만든다. 셋째,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밝은 사람이 된다. 이 세 가지 신조를 잘 지키며 노력하는 게 저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유보라 열정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창작의 길을 걷는 동료 디자이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효선 본인의 생각을 무언가로 표현하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에요. 완성된 디자인을 볼 때 그 누구보다 행복한 건 창작자 자신일 거고요. 하지만 디자인이 ‘업’이 되는 순간부턴 늘 행복할 순 없을 거예요. 여러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창작물이 불특정 다수의 평가를 받게 되니까요.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거예요. 이게 쌓이면 디자인이 싫어지기도 하고요. 그럴 때 무너지지 말란 말을 해주고 싶어요. 회사의 평가에만 얽매이지 말고, 회사 밖에서도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할 아름다움을 창작해보라고. 그것들로 행복을 채워보라고요. 저도 지금 퇴근하고 저만의 NFT를 제작할 생각에 가슴이 뜨겁게 뛰고 있답니다. 하하. 여러분의 창작물들이 지금은 씨앗에 불과해 보일 테지만, 나중엔 여러분이 힘들 때 목을 축여줄 멋진 열매들로 나타날 거예요. 그러니까 꾸준히, 자신만의 디자인을 지속해나가기를!
♥ LA 햇살 같은 효선 님을 더 알고 싶다면?
@vanessaisheeere @corkyvane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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