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비교하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좋은 기억이 많지 않다는 게 정확하다. 자주도 아니었던 아버지 회사나 모임의 가족동반 여행에서 초반에만 잠시 멀쩡하고, 계속 술 드시고 취해 늘 끝이 안 좋았던 기억. 명절에 시골집에 가서도 그놈의 술 때문에 매번 외가에 늦게 간 일. 주말엔 흰 런닝과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파자마를 입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TV를 보고는 오후엔 마른 멸치에 막걸리나 소주 한잔을 하시던 일. 12동이나 되는 아파트의 맨 끝동 맨 끝 층에 살면서 아파트 입구부터 술에 취해 온 동네를 헤집고서야 집으로 들어오셨던 일.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고쳐주겠다던 우산을 버리고 와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맞았던 일. 아, 한 번 더 있다. 스무 살 대학 입학식도 하기 전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 먹고 12시가 넘어 들어오다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에게 발길질을 당했던 일.
스무 살부터 30대 초반까지 아버지와는 거의 전쟁이었다. 10년 전쟁. 왜 그리 싸웠는지 모르겠다. 어른이 되었다 자부했고 내 생각이 그냥 무시당하는 게 싫어 아버지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던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학생운동 끝물에 끝물로 각종 스터디와 집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갖게 된 지식과 생각이 골수 PK이자 선거 때 1번 이외엔 찍어 본 적이 없던 아버지와 부딪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가 지척이었음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어쩌다 집에 들어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는 날이면 나와 아버지 때문에 온 가족이 비상이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에요”
“젊은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다니냐!”
“아버지가 그리 찍으시던 정당은 보수가 아니라 꼴통 집단이에요.”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 뭐해 먹고살건대?”
둘의 싸움은 늘 끝이 좋지 않았다. 흥분한 아버지의 불똥이 엄마나 동생에게로 튀기도 했다. 하지만 싸우면서 요령은 늘어만 갔다. 서로가 건드리면 화가 나는 포인트를 알게 되면서 자제하기 시작했고, 언성이 높아질 만한 포인트에선 서로 주장을 접거나 화제를 전환했다. 자연스레 싸움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세 살 터울인 동생이 새로운 폭탄으로 등장했다. 그래도 싸움의 현장을 보고 학습한 게 있어서인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서른이 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마흔이 넘었다. 아이 책상을 조립하고,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연날리기하고, 공차고 뛰어놀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좋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버지와 잠실야구장에 코리언시리즈를 보러 갔던 일, 선수용 야구 글러브를 사주시고 캐치볼을 하던 일, 아버지 회사에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가서 탁구 쳤던 일, 방학숙제 만들기 과제로 나무 딱따구리를 함께 만들었던 일, 아버지 손 꼭 붙잡고 병원에 갔던 기억, 고3 때 아침마다 차로 등교시켜주시던 일...
이제는 왜 늘 앞서 걸으셨는지, 어릴 적 사진 속에 아버지는 없는지, 주말엔 항상 소파와 함께였는지, 마른 멸치에 소주 한잔을 드셨는지도 그대로 닮아가는 나를 보며 이해가 된다.
몇 년 전 가벼운 말다툼 끝에 아버지와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모질게 한 말에 눈물을 보이셨던 아버지. 둘 다 취중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술꾼인 아버지에게 아들이 한 말로는 최악이었다. 사과를 드렸고 한 달에 한두 번 본가에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인다. 요즘은 많이 드시지도 못하고 일 때문에 당신은 못 드시는 상황에서도 끼니때마다 한잔 하라 하신다. 술 좋아하는 아들 챙겨주고 싶으신 게다.
그렇게 술, 담배 좋아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어도 동생은 담배는 입에도 안 대고 술은 사회생활을 위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조금 한다. 반면 나는 술, 담배를 많이 한 편이었다. 물론 담배 끊은 지는 꽤 되었고, 술도 많이 줄였지만, 좋은 안주만 보면 술 생각이 간절하다. 남편과 아들의 건강 걱정으로 늘 술 적당히 마시라고 잔소리하는 어머니도, 부자가 함께하는 식사자리엔 술과 안주를 챙겨주신다. 아버지와 술잔을 부딪치며 이런저런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크게 의지가 된다. 술 한 잔 함께 할 수 있는 아버지가 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