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로 45cm, 세로 17cm, 두께 2cm의 직사각형으로 나름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다. 피부는 요즘 한창 인기인 제트 블랙이거나 물광 피부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유행 타지 않는 수수한 검은색이다. 뭐 친구 중에 하얀 놈도 있고, 좀 작은놈도 있지만 난 이 업계의 표준에 가깝다.
사무실 책상 위 모니터 아래가 내 집이자 일터다. 각종 메모와 서류 더미, 잡다한 물건들까지……. 가끔 그가 커피를 쏟아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우스패드나 다이어리보다는 낫다. 물티슈로 쓱 닦으면 그만이니까. 그의 손은 하루의 대부분 내 몸 위에 얹혀 있다. 생각이 술술 풀리는지 신이 나서 내 몸을 두드릴 때면 나도 신이 나고, 두드리지는 않고 손가락만 얹은 채 가만있거나, 내 몸통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 나도 갑갑하고 정신이 없다. 제발 좀 얌전히 놓아두었으면 좋겠다.
내 몸에서 제일 길고 넓적한 부분인 스페이스바와 엔터키를 좀 살살 쳤으면 좋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세게 두드리니 몸살이 날 지경이다. 불 꺼진 저녁이면 106개의 버튼 중 유독 두 부위만 욱신욱신 쑤신다. 매일 그렇게 더듬으면서도 눈길은 잘 주지 않는다. 언제나 난 외면한 체, 내 위의 넒대대한 녀석에게만 늘 시선 고정이다. 그가 내게도 애정 어린 시선을 주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쁜 반투명 젤리 옷을 입고 있었다. 요즘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말랑말랑한 반투명 소재를 그가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오래 썼고, 몇 군데가 헐자 과감히 버렸다. 일반 비닐 옷은 그가 싫어해 그냥 맨몸으로 매일 날 더듬고 있다. 내 일이 본래 그런 일이지만 수치스럽다. 예쁜 스킨은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벗겨 놓았으면 가끔 버튼 사이에 먼지라도 제거해 주었으면 좋겠다. 예전의 그 경쾌한 소리가 둔탁해진 지 오래다. 버튼 하나하나 빼내어 박박 씻어 주었으면 좋겠지만, 나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메모를 온갖 곳에 붙이는 것도 모자라 길쭉한 메모지에 이상한 문구를 적어 내 이마에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그는 매일 뭐가 답답한지 그 메모를 보며 중얼거린다. 화가 날 때마다, 집중하려 할 때마다 "하나, 둘, 셋!(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아무것도 아니다!"를 중얼거리며 숨 쉬는 걸 보면 애처롭다. 그가 내쉬는 한숨이 좀 줄었으면 좋겠다. 그가 늘 기분 좋게 날 어루만져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이곳을 떠나, 나 아닌 다른 놈을 만나더라도 그가 행복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