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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보이 Feb 10. 2018

[월간 윤종신] 아니면 말고

브랜드 월간 윤종신

애플스토어가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스티브 잡스는 외부의 레이어 없이 고객들과 직접 만나기 위해 애플스토어를 기획했다. 월간 윤종신은 윤종신 식 애플스토어다.
매월 발표하는 신곡에는 뮤직비디오, 글, 아트 작품이 곁들어진다. 윤종신은 편집장 및 발행인의 역할을 맡는다. 사진은 월간 윤종신 커버에 실린 마크 로스코.  
예능인 윤종신으로 돈을 벌고, 가수 윤종신에 투자했다. '좋니'의 히트 이후 '가수 윤종신'을 대하는 김구라의 태도가 변했다. 일단 인정은 하는 눈치다.
월간 윤종신에는 시의성이 담긴다. 故신해철의 사망 1주기에는 추모곡 ‘고백’을, 2016년 12월에는 어수선했던 시국을 고스란히 담은 곡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내놓았다.
패러디의 출현은 핫한 브랜드라는 증거.  월세 유세윤, 얼간 김준호에서부터 목간 라이브(목요일마다 열리는 스윗소로우 콘서트)까지.

애플스토어

2017년 12월, 국내에 첫 번째 애플 스토어가 들어섰다. '드디어' 였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2001년 미국 버지니아의 한 쇼핑몰에서 신사동 가로수길 오기까. 애플팬들의 억눌렸던 한(限)은 영하 15도의 강추위를 뚫었다. 새벽부터 300여명이 입장순서를 기다렸다. 개장 이튿날까지 2만여명이 서울에 세워진 성지에 발을 내디뎠다. ‘배터리 게이트’는 잊혀진 기억이었다. 애플은 애플이었다.


데이비드 색스의 명저 '아날로그의 반격'에는 애플스토어탄생하게 된 배경이 실려있다. 1997년 스티브 잡스가 돌아왔다. 왕의 귀환이었다. 왕은 매장을 둘러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애플 컴퓨터가 ‘베스트바이'와 '서킷 시티' 같은 허접한 공간에서 팔리고 있었다. 델, 컴팩 같은 못생긴 애들 사이에서 풀이 죽은 채 놓여 있었다. 왕의 고심이 깊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품이라면 담는 그릇도 그에 걸맞아야 되지 않을까. 고객과 만나는 접점이 구린데 어떻게 혁신을 느낄 수 있지?

을 걷어 부쳤다. 고객 경험의 끝을 보여주겠어. 애플 고객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을 구상했다. 직원들을 리츠칼튼과 포시즌스에 보내 서비스 교육을 받게 했다. 컴퓨터 제조업체의 오지랍이었다. 언론의 조롱이 이어졌다. 잡스가 실적이 급한가 보네. 몇 개 안 되는 제품으로 저 큰 매장을 채우겠다네. 업계의 애널리스트는 2년 안에 철수한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후의 역사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취향 공동체

월간 윤종신은 윤종신 식 애플스토어이다. 윤종신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앱을 다운받는다. 리스너가 된다. 윤종신과 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진다. 웰컴 투 윤종신 월드. 이 곳에서 윤종신은 홀로 존재한다. 아이돌이나, 쇼미더머니의 방해도 없다. 윤종신의, 윤종신에 의한, 윤종신을 위한 플랫폼. 한 달에 한번 신곡을 내놓는다. 곡의 영감이 되어준 그림과 사연, 뮤직비디오가 곁들여진다. 입체적인 경험이 완성된다. 이 곳에서 순도 백프로의 윤종신다움을 만날 수 있다. 스스로의 취향과 맞는 사람은 남고, 그 반대면 앱을 지운다. 결속력 높은 ‘취향 공동체’가 탄생한다. 윤종신은 명징한 브랜드가 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11번째 앨범이 망했다. 2년 동안 공을 들인 작품이었다. 시대가 변했다. 음원차트에서는 ‘앨범’이 아니라 ‘곡’이 각개전투하고 있었다. 신곡의 유통기한이 짧아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순위가 바뀌었다. 오전에 내놓은 곡을 두고 저녁에 떴네 망했네 하는 소리가 나왔다.

윤종신은 힘을 뺐다. 커다란 한방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바로 따질 수는 없는 작업을 시작했다. 모두가 ‘정규’냐 ‘싱글’이냐를 고민할 때 ‘싱글’을 ‘정기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2010년 3월의 일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시도였다.


'좋니'의 히트는 ''

월간 윤종신의 아카이브가 쌓여갔다. 크게 터진적은 없었다. 버텼다. SM의 이수만 회장은 히트하지 못해도 곡을 발표하는 그를 두고' 이상한 놈'이라고 했다. (긍정의 의미였다. 작년에 SM은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 엔터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7년째 되던 해가 티핑포인트였다. '좋니'의 메가히트. 63번째 월간 윤종신이었다. 데뷔 27년 만에 처음으로 차트 1위에 올랐다. 팬덤을 넘어 불특정 다수가 곡을 역주행시켰다. 어린 친구들은 라디오 스타의 깐죽대는 아저씨가 진지한 가수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마다  '좋니'의 히트 비결을 내놓는다. 디지털이라는 그릇에 아날로그 감성을 담았네. 랩과 아이돌에 물린 틈새시장을 잘 공략했네. 90년대 아날로그 컨텐츠의 힘을 보여줬네. 모두가 맞고, 모두가 틀렸다. 정작 당사자부터가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대중의 취향을 노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건 움직이는 과녁이었다.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얻어 걸린 거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스스로가 좋아하는 걸 던지고 설득시키려 했을 뿐이었다. "이거 되게 좋지 않아?" 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티스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종신은 좋니의 성공이 ‘덤’ 이라고 했다. 여전히 힘을 뺀 상태였다. 그는 아티스트였다.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고’.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 지은 가훈이다. 초등학생 이던 딸이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았을때 이렇게 적어 주다. 저주 받은 명작 '복수는 나의것'이 흥행에 실패한 후였다.  그의 저서 ‘박찬욱의 몽타주’가훈의 의미를 적었다. 

“이 경쟁만능의 사회에서 참으로 필요한 건 포기의 철학, 체념의 사상이 아니겠느냐라고 딸에게 알려주었다.”

월간 윤종신도 ‘아니면 말고’ 아니었을까. 매번 히트작을 낼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스스로에게는 만족스런 결과물이니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알봐줄 때가 있을 테니까.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월간 윤종신을 두고 ‘지속성의 승리’라고 했다. 결국 시간이었다. 자신만의 분명한 취향을 구축하는 시간. 취향 공동체를 만족시키는 시간. 막막한 상황에서 꾸준히 밀고 나가는 시간. 세상이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시간. 이 시간 동안 월간 윤종신은 무르익었다. 다른 크리에이터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이렇 해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럼 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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