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애플
1984년이었다. 아버지는 미국계 광고대행사 매켄에릭슨의 일본지사에서 연수중이셨다. 매켄의 부사장은 대한민국에서 온 청년 카피라이터에게 한마디를 주었다.
“안상, 광고는 결국 인간화가 핵심이네”
그 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애플의 “1984” 광고가 세상에 나왔다. 가장 인간화된 형태의 광고였다.
돌연변이
“좀 더 애플스러웠으면 좋겠어요.”
“너무 애플스럽지 않나요?”
오늘 회의에서도 애플은 기준이 된다. 어디 광고회사 뿐이랴. IT 회사, 디자인 회사, 심지어 프리젠테이션을 가르치는 스피치 학원까지 애플의 세례를 받았다.
‘돌연변이’라 불린다.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룰을 파괴했다. 소수의 제품에 올인 하는 제품 라인업, 투명경영과는 거리가 먼 폐쇄적인 조직문화, ‘배터리 게이트’로 대변되는 오만함... 보통의 기업이었다면 오래 전에 망하고도 남았을 요인들이 도리어 지금의 애플을 만들었다. 열광적인 팬덤은 신흥종교에 비견된다. 오라클의 CEO 래리앨리슨의 말처럼 사람들은 애플의 제품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중이다. 포르쉐, 페라리, 프리우스 같은 자동차들처럼.
숫자는 더 압도적이다. 이 글로벌 대장주는 시가총액 1조달러를 넘본다. 영업이익률은 30%가 넘는다. 삼성 갤럭시의 6배 수준이다. 두 브랜드의 스마트폰의 기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브랜드력'의 차이이다.
‘가치투자자’ 워렌버핏은 근래 애플의 '격'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오랜 기간 기술주를 기피해온 것으로 이름난 그다. 변화가 빠르고, 불안정하다. 무엇보다 자신이 기술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랬던 버핏이 애플의 주식을 쇼핑한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80억 달러(30조2000억원)어치나 쓸어 담았다. '오마하의 현인'이 변심한걸까. 버핏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이폰을 끼고 산다. 애플 제품의 연속성은 엄청나며 우리 주변 삶의 중심이 되는 정도 또한 거대하다”고 했다. 버핏은 변하지 않았다. 애플의 지위가 달라졌다.
애플의 성공을 다루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간화’라는 요인 하나만 다룬다. 사실 이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애플 컴퓨터
“정말 엉뚱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름이었지요. 애플과 컴퓨터라,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 아닙니까! 결국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애플의 초대 회장 마이크 마쿨라
마케팅 구루 히스 형제는 저서 ‘스틱’에서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를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만큼 상대도 알 것이라는 착각이다. '지식의 저주'에 빠진 '전문가'들은 우리 주변에도 넘쳐난다. 애플이 등장하기 전의 컴퓨터 업계도 마찬가지였다.
알테어 8800 (Altair 800)
코모도어 VIC-20 (Commodore VIC-20)
라디오쉑 TRS-80 (Radio Shack TRS-80)
아이비엠 PCjr (IBM PCjr)
이른바 '기술 전문가'라는 이들이 싸지른(!) 제품명이다. 촌놈 겁주는, 딱딱하고, 일방적인 이름들. 이 속에서 ‘애플 컴퓨터’가 등장했다. 이름에서부터 유일해졌다. "모든 가정에 컴퓨터를 보유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초창기 미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네이밍이었다. 집에서 아이들과 가지고 노는 컴퓨터는 '사과'처럼 가볍고, 친근해야 하니까.
사용자 경험
‘기술 만능주의’에 반기를 든 첫 번째 회사였다. 수만 곡을 담는 기술도 중요했다. 세 번의 클릭으로 곡을 찾는 편리함은 더 중요했다. 애플 하면 회자되는 '사용자 경험'의 탄생이다. 잡스에 의하면 ‘사용자들이 제품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 사용자를 위해 만들어져야 했다’. 애플의 기술은 쉽고, 심플했다. 재미가 있었다. 소비자들을 매혹시켰다.
살가운 회사는 아니었다.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 고객에게 묻는 법이 없었다. 그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테니까. 핸리포드의 말마따나 '자동차'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더 빠른 말'을 원한다고 답할 테니까. 결국, 잡스가 기준이 되었다. 그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까다로운 소비자였다. 세탁기 하나를 사기 위해 2주동안 가족회의를 여는 남자였다. 집 거실에 조지 나카시마의 의자 하나만을 두고 생활하던 사나이였다. 그는 엔지니어는 아니었으나 기술을 요리하는 법을 알았다. 맛있고 멋스런 음식을 차렸다. 사람들은 처음 맛보는 요리에 넋을 잃었다. 애플은 세계 최고의 혁신 회사가 되었다.
Think Different
경영 컨설턴트 사이먼 사이넥은 애플의 위대함을 '왜'에서 찾았다. “Think Different”는 애플의 존재이유이다. 정체성이다. 테크놀로지만 아는 찐따가 아니다. 기술을 향유하는 인간이다. 남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다. 광고는 이 '사람'을 그대로 보여준다. 본래 광고는 '발명'이 아닌 '발견'이니까. 아이폰의 지난 광고들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 페이스타임으로 타지에 출장을 간 아빠에게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딸
/ 크리스마스 시즌, 가족들의 모습을 촬영한 후 동영상을 만든 소년
/ 시리에게서 오후 일정이 없다는 말을 듣고 흐뭇해하는 배우 존말코비치
이제 애플의 광고는 하나의 '장르'이다. 페이스북, 구글 같은 업계의 후배들도 광고에 인간을 담는다. 사람 냄새가 나는 광고를 내보낸다. 오늘 회의에서도 애플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날로그
그날 잡스는 갈색 서류봉투를 들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 ‘맥북에어’가 나왔다. 그의 한마디. “놀랍지 않나요?” 관객들의 나지막한 탄성. 우레와 같은 박수.
이런 식이다. 기술기업이 무척이나 아날로그 친화적이다. 아이팟의 광고 카피는 “당신 주머니 속에 노래 1000곡“이었다. (잡스가 이 제품을 소개할 때에 청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팟을 꺼냈음은 물론이다.) 아이패드 광고에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연필 뒤에 아이패드를 숨겨놓았다. 서류봉투, 청바지, 연필 같은 아날로그 아이템들과 최첨단 제품이 만난다. 극적인 컨트라스트 효과가 발생한다.
애플스토어는 애플식 아날로그의 최전선이다. 생기 넘치는 파란색 애플맨들이 고객을 만난다. '지니어스바(GENIUS BAR)'에서는 애플 제품에 빠삭한 '천재들'이 도움을 주겠노라고 말을 건다. 소비자들은 애플스토어에서 한껏 인간화된 애플을 만난다. 그리고 이 브랜드에 껌뻑 넘어간다.
다윗
애플은 '다윗과 골리앗' 프레임을 만드는데 선수이다. 물론 다윗의 역할은 애플이다. 자신보다 거대한 경쟁사가 골리앗이 된다. “1984” 광고에서는 ‘빅브라더’ IBM을 깨부쉈다. 건강미 넘치는 금발의 젊은 여인이 도끼를 던졌다. 광고 한 편으로 슈퍼컴퓨터의 대명사 IBM은 개인 컴퓨터 시대를 막는 적폐세력으로 몰렸다.
'Mac vs. PC' 광고에서는 MS(마이크로소프트)가 골리앗이었다. '맥' 청년과 'PC' 꼰대의 대결구도였다. MS를 시대에 뒤떨어진 구제불능으로 ‘보내버렸다.’
"예술적인 상상력에는 예언력이 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애플이 그랬다. 이제는 애플이 상대할 골리앗이 보이지 않는다. 골리앗이 죽었다. 그럼에도 애플은 여전히 다윗처럼 보인다. 젊고 날렵하다. 1등같지 않은 1등이다. 생전에 잡스는 '지구에서 가장 큰 신생회사'라며 애플을 소개했다. 애플 내에 위원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면서였다. 한때는 골리앗을 이기려 다윗이 되었다. 골리앗을 죽였다. 온전히 다윗이 되었다.
인간
아마존의 제프베조스는 회의를 할 때마다 자리 하나를 비워놓는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고객의 자리라는 것이다. 아마존의 고객 집착(Customer Obsession)을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구글은 인공지능 프로그램(AI) 알파고의 기술력을 알리기 위해 인간계 대표 이세돌과의 바둑 대결을 기획했다. 다섯 번의 대국을 벌이는 동안 구글의 지주회사 알파벳의 시가 총액은 58조원 늘었다.
이제는 모두 기술만큼이나 인간을 중심에 둔다.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을 생각한다. 여기까지 왔다. 애플의 찬란한 유산이다. 돌이켜보면 ‘Think Different’의 본질도 결국 인간이었다. 애플은 늘 '인간'을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늘 달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