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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욕망에 대한 무관심

- <보바리 부인> 속 비극의 원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환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여인 엠마가 결혼 이후 자신의 환상과 대비되는 현실에 좌절하기를 반복하다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다. 젊고 아름답지만 지극히 평범한 엠마가 상상 속 낭만에 도취하여 살아가다 철저히 자신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분노스럽기도 했다. 그 분노는 처음엔 어리석은 엠마를 향한 타박으로 시작했다. 사랑의 실패를 맛보고 그에 대한 허무함을 맛보았음에도 어찌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안타까웠다. 그러한 안타까움은 엠마가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우둔한 샤를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샤를은 엠마를 사랑했음에도 엠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의문이 떠오를 수박에 없었다. 샤를은 어째서 그리도 우둔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의문의 해답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그 시절 여성들을 억압했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샤를, 그는 소설 속에서 엠마를 정말 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엠마의 변덕과 송곳 같이 뾰족한 성격을 다 견디고 크게 화조차 내지 않는다. 엠마가 집안 경제를 파탄의 지경에까지 내몰았음에도 좌절은 할지언정 엠마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가 엠마에게 보이는 포용심과 관대함은 분명 사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정작 그가 정말 엠마에게 필요했던 사랑의 조건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인의 행복, 본인이 추구하는 가정을 꾸리는 데에는 굉장히 충실하였으나 정작 엠마의 욕망에는 무관심했다. 그는 엠마의 꿈, 엠마가 그리는 환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 있는가? 엠마의 근원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한 적 있는가? 엠마가 로돌프와 헤어진 후(샤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심하게 우울해하자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간 것이 전부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외출은 엠마와 레옹이 재회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고, 본인의 우둔함이 엠마와 레옹의 간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엠마의 불륜은 샤를의 엠마의 심중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고서야 성립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샤를의 무관심의 근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정말 샤를 본연의 우둔한 성격의 탓이 전부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엠마의 욕망에 무관심했던 것은 샤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엠마를 포함한 여성의 욕망에 무관심했던 것은 바로 그 폐쇄적 사회였다. 엠마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레옹과 로돌프마저도 본인들의 욕망에 집중했을 뿐 엠마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 봐주지는 않았다. 여자의 욕망마저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로돌프도-물론 엠마를 유혹하기 위한 의도이긴 하였으나-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세상 누구나가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인 겁니다!”(『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민희식 옮김, 전자책 42%) 로돌프의 대사라는 점이 다소 역설적이긴 하나 이 문장은 그 시대 기혼 여성들의 입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엠마 또한 샤를의 귀속물, 혹은 정부들의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 오롯이 엠마로서 존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샤를은 집안이 거덜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독백한다. ‘무엇이 원인이란 말인가? ……전혀 영문을 알 수가 없다!’(『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민희식 옮김, 전자책 88%) 그러나 영문을 모른다는 점 그 자체가 문제다. 로돌프가 엠마를 유혹하기 위해 했던 수많은 말 중 다음 문장은 샤를의 질문에 간접적으로나마 대답을 제공한다.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꿈과 행동이, 그리고 보다 더 순수한 정열과 보다 더 격렬한 향락이 번갈아가며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끝도 없는 공상이나 분별없는 짓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민희식 옮김, 전자책 39%) 샤를은 몰랐겠지만, 로돌프의 말처럼 엠마는 고통받았다.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만든 세상으로부터. 그러한 엠마에게 있어 자신의 쾌락에는 무지한 샤를이 따분한 세상에 귀속되는 하나의 구성물에 불과한 것은 당연했다. 밋밋한 생활은 조미료를 갈구할 수밖에 없으니 엠마에게 향락은 하나의 구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목하고 싶은 점은 로돌프의 표현이 엠마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 엠마를 제외하고도 ‘이 세상에 (비자유로부터)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아무튼 남자는 자유롭다. 남자는 온갖 정열을 경험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수가 있고, 모든 장애를 뛰어넘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행복이라 해도 야심을 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언제나 방해받기만 한다. 무기력해서 남이 말하는 대로 되기 쉬운 여자는 육체의 연약함과 법률상의 속박에 묶여버린다. 여자의 의지는 마치 모자의 끈으로 매놓은 베일처럼 바람 부는 대로 나부낀다. 언제나 무언가의 욕망에 이끌리고 어떤 세상에 대한 체면에 규제를 받는 것이다.’(『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민희식 옮김, 전자책 23%) 이 문장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자유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듯, 비자유는 그 시절 많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점은 그 시절의 자유가, 엠마의 분별성마저 앗아갔다는 점이다. ‘일부러 애써 찾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거짓이다! 어떠한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다.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겨져 있다.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이 입술에 남는 법이다.’(『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민희식 옮김, 전자책 79%) 쾌락을 통찰했다는 점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이 문장은 쾌락의 정체를 고발한다.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엠마의 환상은 하나의 키치였다. 결핍을 부정하고 순수하게 긍정되기만 하였던 그의 환상엔 현실적인 한계가 존재했고, 불완전했다. 문제는 엠마가 누군가에게 이끌려 판단할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선택 속에서 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다 보면 이러한 진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거란 점이다. 물론 세월이 지나도 깨닫지 못했을 수 있으나, 많은 현대의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에게는 분별성을 키워갈 기회가 엠마에게보다 훨씬 많이 제공된 것 같다고 느낀다. 이는 확실히 어떤 사회인가에 따라 쌓을 수 있는 경험적 깨달음이 달라진다는 점을 방증한다.


 오늘날에도 분명 보바리즘이 존재하지만, 엠마의 경우처럼 강렬하게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고하는 인간은 환상을 품을 수밖에 없으며 많은 미디어 매체가 사람들의 환상을 키우고, 공유하고, 키우기를 반복하지만 우리는 삶이 지속됨에 따라 어느 시점에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그리는 것처럼 영원한 사랑은 있을 수 없고, 삶의 진정한 행복은 그 불완전성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각자에게 다양하게 제공되는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이해되는 수밖에는 없는 진실이다. 그러니 비도덕적 자유 속에서 어리석을 수밖에 없었던 엠마를 나는 이해하고, 연민으로 용서한다. 물론 그의 어리석음은 분명 가족의 비극으로 이끌었기에 비난의 대상이지만, 어머니가 될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엠마를 한 개인으로써 용서하고 싶다. 본인의 환상의 정체조차 알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자신의 딸을 품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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