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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 시대의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기를, 호모 사케르란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삶과 죽음이 단지 물리적 상태로 설명되기보다는 그것이 성립하는 데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작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의미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시키는 데에 정치적 공동체가 관여할 수밖에 없다는 테제로 이어진다. 그러니 존재의 종말을 뜻하는 인간의 죽음은 정치적 죽음일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죽음을 단지 ‘상태’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방식 중 하나인 ‘살해’는 타자에 의해 완수된다는 점에서 가장 문제적이다. 공동체 내 관계는 그 관계자 중 한 명인 누군가가 죽음으로써 파멸된다. 그러나 죽음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속성을 상기했을 때, 그 죽음이란 반드시 ‘물리적 죽음’일 것인가? 


‘폴리스’가 ‘가치 있는 생명’을 위한 공동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은 ‘폴리스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들의 무가치를 생산한다. 이들은 정치적 능력과 발화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분명 자연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엄밀히 따졌을 때 언제든 ‘살해당해도 상관없는 벌거벗은’ 생명체, 즉 호모 사케르다. 언제나 그들은 죽음이라는 종말의 위기에 상존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사회적 죽임’을 당한 생명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와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유사한 형태의 위험성이 현대 사회에서 발견된다. 지금에 이르러 초연결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토록 거대한 공동체에 살아가고 있으나 언제 어떻게 자신의 추태가 세상에 드러나느냐에 따라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는 물리적으로 죽임을 당할 위험성까지 내포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기 어려운 경계 밖으로 내몰린다는 점, 삶의 존재 가능성을 일부 부정당한다는 점에서 거의 죽음과도 다름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고 표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통하는 존재’, 즉 호모 커뮤니쿠스이기도 하다. 그러한 성격이 극대화된 시대가 바로 현대이며 이는 SNS라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관계망을 구축하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된다. 사람들은 SNS를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나아가 ‘커뮤니티’를 생성하며, 나아가 각자의 폴리스 안에 거주한다. 정확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폴리스의 교집합 안에서 사회적 삶을 영위한다. 그러한 커뮤니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친밀감을 획득하는 방식(인스타그램의 팔로잉-팔로워)으로 형성된 커뮤니티이고 둘째는 익명성 아래 우연히 같은 이슈를 맞닥뜨려 댓글을 달거나, 혹은 관조하는 방식으로 그 시대의 담론을 공유하는 방식(뉴스 기사, 디씨인사이드)으로 형성된 그것이다. 두 형태의 커뮤니티는 상호 교류하며 한 개인의 발화를 정치적으로 위치시키기도 한다. 


각자의 폴리스 안에서, 그들은 정치적 주체로서 미디어 권력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자각이 있는가? 사람들은 익명성이나 대중이라는 집단 속에 숨어 개인의 입장에서 어떠한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판단하고, 심지어는 판결하기를 즐긴다. 그러한 유희가 적극적으로 발휘되는 공간은 앞서 말한 커뮤니티의 종류 중 후자에 해당한다. 자신의 발화가 큰 위치를 차지하는 소규모 커뮤니티보다, 수십 수만 명의 군중 속에서 댓글 혹은 ‘공감’ 표시가 지극히 미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간. 그러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논리에 의해, 미디어로 공유된 여론은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발화가 된다. 핵심은 그들이 ‘개인’으로서 언표한 행위가 소셜 미디어라는 사회적 공간에서 ‘집단적’ 힘을 발휘하게 되는 메커니즘 그 자체에 있다. 어떤 규모의 커뮤니티냐에 따라 개인이 발휘하는 영향력도 달라진다는 점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영향력이 거대 담론을 향한 비판이라는, 응당한 대항적 성격을 지닌다면 다행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논리적 반박이나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이슈, 한 마디로 잘잘못이 명확히 판가름되는 상황에 유독 쉽게 반응하고, 특히나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 가장 강력한 표현의 자유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를 두 가지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코로나19가 한국 내에서 유행하던 초창기에 대규모 접촉을 일으켰던 인물에 대한 집단적 비판이고, 두 번째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출연자의 인성에 대한 비판이다. 첫째는 코로나19를 대비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상황에 대한 망각이 주요하게 작용하였고 둘째는 ‘언제나 무해하고 무결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비인지가 한 개인을 향한 집단적 린치로 이어졌다. 그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라는 극단적 사회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가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판단 여부가 다를 수 있겠으나, 그들이 겪는 ‘호모 사케르적 위기’는 함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사회의 중요한 징후를 보여준다.


아감벤은 “국가 권력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자신의 고유한 종적 대상으로 승격시킨 규율화 과정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더 이상 정치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 즉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이라는 또 다른 과정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내적으로 결탁되어 있다는 테제”를 설명하는데, “권력의 탄생에 주체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푸코와 라 보에티의 주장으로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권력의 주체가 된 벌거벗은 생명들은 개인의 자정적 사유를 타인들에게 전가한 채 여론이라는 정치적 권력의 참여자가 됨으로써 전체주의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해 없이 사람들이 쉽게 착각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벌거벗은 생명’ 모두가 자연화된 배제의 위기를 체험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배제’ 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비식별역’, 즉 사회적 검증 이전까지는 폴리스 안에 포함되었는지 배제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없는 영역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 역시 배제될 수 있으므로 남들을 배제 시켜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논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바로 호모 사케르를 생산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다. 그것은 경계의 비식별적 특성을 이용해 벌거벗은 생명들의 입지를 망각시키고, 같은 영역에 존재하는 사람을 경계 밖으로 밀어낸다. 그러나 앞서 제시된 사례들을 생각했을 때 도덕적 결함, 혹은 개인의 명백한 잘못이 그들에게 ‘사회적 사형(그것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을 선고할 합리성을 확보해주는가? 가장 기본적인 인권 개념을, 명징하게 결단 내리기 어려운 도덕 문제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은 타당한가? 실제로 ‘사회적 매장’ 수준을 넘어, 생존의 위기까지 겪고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 ‘판결’ 내리게 될 위험성을 감히 일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단순 명료한 문제가 아닌 판결 어려운 복잡한 정치적 문제에도 발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내비칠까 하는 우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소통하는 일이야말로 체제가 호모 사케르의 문제를 가볍게 은폐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따라서 이쯤에서, 폴리스에 거주하는 조에로서의 책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성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과제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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