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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포스트휴먼의 환상성 (2)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부제  : 알랭 바디우의 이론을 바탕으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해석하기



2. '릴리' ; 무해한 욕망의 실현자


이 소설의 배경은 두 곳으로 나뉜다. 하나는 ‘데이지’, ‘소피’, ‘올리브’ 등이 살아가는 ‘마을’이고, 나머지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성인이 되면 순례를 떠나는 ‘시초지’다. 그 두 장소는 서로 분리되어 있고, ‘시초지’ 사람들은 ‘마을’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순례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마을’ 사람들 역시 ‘시초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에게 태생부터 허락된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이 ‘마을’의 설립자들이 ‘릴리 다우드나’와 ‘올리브’라는 사실이다. 데이지의 선생님에 따르면 그들은 마을의 사람들에게 “이 아름다운 마을을 물려주었고, 시와 노래와 축제를 가르쳤”(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18쪽. 앞으로 같은 책 인용은 쪽수만 표기)다. 그러나 데이지는 그러한 설명에 이렇게 대꾸한다. “하지만 그건 시초지의 역사에 비하면 너무 짧고 비어 있잖아요.” 데이지의 말과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들의 존재는 구체적인 역사를 의미하기보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술되는 일종의 ‘신화’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릴리 다우드나’와 ‘올리브’는 역사적인 존재보다는 그 정체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신화적 존재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화적 존재인 릴리와 올리브,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정확히는 ‘진실’을 추적하던 ‘데이지’가 알게 된, ‘릴리’를 추적하던 ‘올리브’의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알맞다. 화자인 데이지의 서술을 통해, 사실 ‘마을’의 설립자라고 알려진 두 사람 가운데 최초 설립자는 ‘릴리 다우드나’이고, ‘올리브’는 ‘릴리’가 만들어낸 자손이면서 최초로 “마을의 진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릴리’의 과거에 대해”(26) 알아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올리브 역시 한때 데이지처럼 진실을 알아내겠다는 포부로 지구로 향한 것이었고, 그곳에서 마을이 만들어지기 전 릴 리가 지구에서 받았던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릴리는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증오한 것으로 보인다. 릴리에게는 나와 같은 질환,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이 있었다.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릴리의 얼룩이 특별한 정보값을 갖지 않는 하나의 특성일 뿐이었지만 지구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릴리를 마음껏 멸시하고 혐오할 수 있는 하나의 낙인이었다.”(44)


릴리는 우등 유전자로만 구성된 신인류를 창조해내기도 했지만, 아이를 갖고 싶어진 이후에는 새로운 유전자 연구에 돌입했다. 올리브는 릴리가 시작한 새로운 연구의 목적에 대해, “그녀는 얼굴에 흉측한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48) 싶어했다고 기록했다. 그녀가 구상한 세계가 이른바 ‘서로의 결점을 결점으로 여기지 않으며, 서로를 짓밟지 않는’ 세계, 즉 서로를 배제하는 대신 상처와 폭력을 배제하는 세계라는 점은 그러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있어 릴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어떠한 ‘해(害)’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였음을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세계, 따라서 세상 자체가 무해한 세계. 이 작품이 ‘무해함’을 논하는 좋은 작품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릴리는 유토피아의 첫 번째 조건을 제도나 체제의 면에 두지 않고 유토피아 거주민들의 ‘무해함’으로 정했다. 그리고 올리브는 그러한 세계를 “그녀 자신의 분신에게”(49) 주고 싶어한 릴리의 욕구를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릴리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이 도시를 만들었다.”(23)) 


릴리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마을’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며, 실제로 ‘마을’에는 슬픔은 알지만 지속적인 갈등과 고통, 불행은 상상의 개념으로만 남아 있는 인류가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따지자면 엄연히 기존의 인류의 ‘유해한’ 한계를 유전자 조작을 통해 뛰어넘은 ‘포스트휴먼’적 존재다. 그러나 그렇게 ‘초인류’가 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한계를 뛰어넘었는지를, 즉 인류와 릴리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에 대해 설명해줄 역사 대신, 역사의 탈을 쓴 신화만이 남아 그들에게 평온의 온상을 제공했다. 불행과 고통, 갈등이 모두 인간에게 있어 ‘해악’이라는 전제를 통해서 릴리의 성과를 바라보자면 그가 마을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선택을 했다고 하기에는 분명히 석연찮은 지점이 남는다. 릴리로부터 발견되는 첫 번째 아이러니는, 자신이 원하는 ‘무해한 포스트휴먼’을 창조해내기 위해 기존의 인류,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가진 인간성까지 부정해버렸다는 것이다. “같은 자궁에서 태어나 자매처럼 자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낭만적 감정도 성애도 느끼지 못하는 것”(52)은 릴리가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대가로 치른, 디스토피아적 결핍이다. 


문제는 그들에게 ‘사랑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올리브와 순례자들이 지구로 갔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을의 사람들끼리 사랑(‘사랑’ 자체가 광범위한 개념이라 작품 내에서도 혼용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행위에 있어서의 사랑은 낭만적 감정과 성애 스펙트럼에 해당한다. 혈연 간의 사랑이나 친구 간의 우정보다는 타자 간의 탈경계적인 작용에 가깝다.)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사랑에 빠질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릴리가 ‘차별과 배제’를 없애기 위해 마을에 사는 인류를 모두 ‘동질화’시켜 버린 데에 있었다. 작품 내에 동질화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된 부분은 없고 그것이 릴리가 의도한 바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평화가 동질화의 산물이라는 것은 마을에 사랑이 부재한다는 점을 통해 추론이 가능하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 32쪽) 그리고 어떠한 동질화든, 그것의 기준이자 구심점이 되는 하나의 속성이 존재한다. 릴리에게 있어 유토피아란 ‘자신의 분신’들이 배제받지 않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발생한 동질화의 구심점은 바로 릴리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릴리의 유토피아 건설은 결국 ‘자기만족’에 기초했고, 그가 실제적으로 구원한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는 그가 꿈꾸는 세계를 “그녀 자신의 분신에게” 주고 싶어 했고, 릴리가 겪었던 분리와 차별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태어난 릴리의 분신들은 역동적인 사랑 대신 지루한 평화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다. 차별과 배제가 왜 폭력적인지, 어째서 문제적인지를 경험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을 향한 선험적 구원은 릴리가 최초에 의도했던 바를 훨씬 무색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마거릿 애티우드의 대학 교수였던 맥키번은 인간 유전자가 이렇게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에 의해 개선될 경우, 인간이 서로 자웅을 겨루어야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생명과 신비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뤄내는 성취도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이 얻은 행복과 평화는 진정으로 그들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맥키번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성취는 이미 그들 안에 프로그래밍 된 결과물이다.(마거릿 애티우드, 같은 책)


자기만족에서 기원한 유토피아의 건설이 문제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유토피아가 동일성에 기초하고 있는 나머지, 릴리의 것과는 다른 비정상성을 가진 사람들까지 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릴리의 비정상성은 기본적으로 ‘신체적 낙인’과 ‘이민자의 딸’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기인했다. (“이민자의 딸, 그리고 흉측한 외모를 가진 음침하고 삐쩍 마른 소녀.”(45)) 마을에는 신체적인 결점들을 서로 흉보지 않는다고 하니 첫 번째 비정상성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는다. 두 번째의 경우, ‘마을’이라는 하나의 협소하고 작은 유토피아에서는 ‘먼 타국’에서 온 사람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세계는 애초부터 많은 차이가 제거된 세계관이다. 모두가 장애나 얼룩을 가진 세상이라면 그 얼룩이 어떻게 다르게 생기든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신체적인 차이 역시 인위적으로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릴리를 배제했던 그 두 가지 특성(신체적, 민족적)을 제외한 제3의 특성이 등장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작품 내에는 차별과 배제를 제거한 유전자적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되어 있지 않아서, 이와 같은 상황이 도래했을 때 정말로 차별과 배제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은 남을 수밖에 없다.


릴리의 자기만족은 마을의 자손들에게 자신의 욕구를 투영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앞서 언급한 문제적인 지점들로부터 알 수 있듯, 그들은 미래의 차별과 배제로부터 구원받았을지라도 순례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사랑의 기회를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마을에 ‘정주하기를’ 요구받았다. 올리브가 최초로 이동선을 탔을 때, 이동선에 내장된 프로그램이 ‘동부로는 접근할 수 없다’며 올리브가 지구의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제한한 것(26)은 그런 의미이다. 릴리의 의도는 그들끼리의 유토피아에서 벗어남으로써 고통과 불행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릴리가 사랑하는 아이들로부터 행복 대신 만족을 선택한 것을 강제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행복은 만족에 대한 변증법적 부정이며, 행복은 창조와 새로운 유적 속성의 편에 놓인다. 반면 만족은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이라 명명한 어떤 것에, 주체성이 대상성으로 떨어지는 격하의 편에 놓인다(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2016. 91-92쪽)는 점에서 릴리는 마을의 인류에게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를 빼앗고, 그들을 스스로 ‘무해한’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릴리의 자기만족은, ‘자기만의’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욕구를 투영함으로써 그들을 대상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중간과제 소논문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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