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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포스트휴먼의 환상성 (3)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부제  : 알랭 바디우의 이론을 바탕으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해석하기



3. 무해한 유토피아의 정체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와 아서왕 이야기 속 아발로 섬 같은 유토피아들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속 유토피아처럼 보통 실제 지도 상에서는 가 닿을 수 없는 섬에 위치하고 있었다. … 그러다 현실의 지도 제작이 바다에서 기존에 ‘발견된 적 없는’ 영역을 채워버리자 섬은 유토피아의 후보지에서 제외되었고, 유토피아-디스토피아는 더욱 미지의 영역으로 떠밀려 나갔다. … 유토피아가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태양계와 아주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 혹은 평행 우주, 혹은 모든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만큼 오래된 과거, 혹은 마찬가지로 미지의 영역인 미래였다.”(마거릿 애티우드, 같은 책, 115-117쪽) 이와 같은 유토피아의 변천사를 통해 알 수 있듯, 유토피아의 지정학적 조건은 기성 인류로부터 ‘분리된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유토피아 자체가 분리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마을’ 역시 지구와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설정은 유토피아가 ‘이상성’을 명분으로 ‘비이상적인 것’들을 배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토피아적인 상상은 순수/순결 이데올로기와 그 궤를 함께 한다. 혼탁해서는 안 되고, ‘악’으로 규정될 만한 것들이 존재해서도 안 된다. 유토피아의 지리적 조건이 ‘사람들에게 발견된 적 없는 땅’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의 철저한 자발적 고립의 성격이 무엇을 배격하는지를 알려준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의 주체가 설정한 ‘적합성’에 부합하는 사람만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이 작품 속에서 유토피아의 주체란 ‘릴리’였으며, 태생적으로 적합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에 반발할 경우 은밀하게 배척당한다.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지는 않으나, 시초지에서 돌아오지 않은 순례자들이 마을에서 서서히 ‘망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 자체를 소거함으로써 그들의 부재가 유토피아 공동체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도록 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마을의 구성원들을 동질화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결국 타자에 대한 간접적인 부정 혹은 배제로 해석된다. 타자화를 막겠다는 릴리의 의도가 역설적으로 타자를 규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포함 작용이 있으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배제가 동시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러한 릴리의 모습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알랭 바디우가 지적한 윤리학의 함정이다. 그 함정이란, 윤리가 ‘타자에 대한 관용’을 그 일차적 목표로 삼을 때, 사실상 그 유명한 ‘타자’란 오직 그가 좋은 타자일 때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타자란 누구인가? 바로 우리와 동일자가 아닌가?”(알랭 바디우, 이종영 옮김, 『윤리학: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2001. 33쪽) 타자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겠다는 릴리와 존재하는 타자를 어떻게 관용할 것인지를 논하는 윤리는 그 목표가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차이를 근소하게 만들거나 근소한 차이만을 차이로 허용하는 것’, 따라서 타자와의 갈등, 혹은 이해, 혹은 수용 자체의 난이도를 낮추는 편의주의에 의존하는 것. ‘마을’이라는 유토피아는 이상성을 규정하는 대신 비이상성을 배척하듯, 갈등을 제거하는 대신 타자까지 제거했다. 


‘마을’은 ‘허용되는’ 타자, 즉 동일자만의 세상이며 타자의 제거가 곧 타자화의 본질적 문제 해결과 동치되지는 않는다. ‘마을’이라는 유토피아는 릴리의 안전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다. 릴리라는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유토피아는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회피를 어렵게 만드는 타자의 존재를 포기한 결과이기도 하다.(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 19쪽) 그러니 제3의 비정상성이 등장했을 때의 평화를 확신해주지 못하며, 순례자들이 시초지에서 만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을로 돌아온 사례가 없는 간접적인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 작품 내에서는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지만, 어쩌면 마을로 함께 돌아올 수도 있었을 순례자들이 시초지에 남아 투쟁한 것은 마을이 가진 디스토피아적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이질성이 부재하는 세계에 시초지의 인류를 데려간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마을과 유비되는 ‘무해함’의 유토피아 역시 안전을 우선시한 이데올로기이며, 마을이 마치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결과물인 것처럼 제시되었듯 무해함 역시 타자를 위한 윤리인 것처럼 제시되지만, 그것의 실상은 타자를 자기 뜻대로 규정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만족이다. 무해한 남성성, 무해한 캐릭터, 무해한 이미지, 무해한 관계 등, 무해함은 무해함의 속성을 투영할 대상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무해함을 욕구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마저 ‘무해한 나’로 대상화하기도 하고, 나아가 그러한 규정에 어긋나는 자신을 검열함으로써 신경증적인 강박(박한선, 「순수로의 도피」, 『릿터』, 38권, 민음사, 2022, 18쪽)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양상이 유사하게나마 릴리에게도 드러나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신화적 존재로서의 릴리’를 통해 알 수 있다. 릴리가 이 마을을 만들게 된 배경이나 과거에 당했던 차별이나 배제의 역사가 은폐되고, 가장 아름다운 마을을 창조한 위인으로 신화화된 것은 분명 릴리의 의도가 개입된 산물이다. 릴리 말고는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마을에는 없었을 것이므로, 릴리를 신화화할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릴리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해한 유토피아를 창조한 사람이 결코 유해해서는 안 된다. 무해한 유토피아에서는 유해한 주체조차 무해한 대상으로밖에 수용되지 않는다. 릴리는 그렇게 지구에서 ‘신인류’를 만들고 분리주의적 디스토피아를 건설하는 데에 일조한 한때의 자신을 뒤로하고, 갈등과 고난이 없는 세상을 물려준 최초의 설립자로서 형상화되었다. 릴리는 무해한 분신들을 주체적으로 만듦으로써 자기만족한 동시에, 무해한 유토피아를 존속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무해한 형상으로 객체화한 것이다. 


무해함이 투영될 대상 없이는 성립할 수 없듯이, 무해함을 욕구하는 주체가 결코 ‘무해한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애초에 ‘무해하다’는 용언의 주어 자리에는 본래 행위를 수행할 수 없는 물질의 이름만 들어갈 수 있으며, 사물은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백승주, 같은 글, 14쪽) 따라서 유전자 조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 세계에서는 무해한 ‘사람’, ‘주체’ 대신 무해한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작품 속에서 ‘무해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유전자 조작이라는, 인간성의 근간부터 흔드는 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마저도 곳곳에 균열이 존재함을 지금까지 설명했다. 올리브가 순례 의식을 만들기 이전까지, 무해한 사람들은 무해한 세상에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주체적 행위의 동기조차 얻지 못한 채 평온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사랑도, 고통도, 시련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삶을 두고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데이지는 순례의 의미가 “지구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우리가 무엇을 외면해왔는지, 우리가 우리만의 아름다운 마을에서 살아가는 동안 저 행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지만, 그보다 근간에 있는 것은 릴리의 욕구가 투영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으로 ‘탈경계’하는 기회의 의미이다. 그리고 올리브는 그렇게 최초로 주체화를 체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중간과제 소논문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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