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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포스트휴먼의 환상성 (5)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부제  : 알랭 바디우의 이론을 바탕으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해석하기



5. 무해한 주체의 환상성 - 사랑의 주체의 가능성


“릴리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이 도시를 만들었다.”(23) ‘사랑’ 역시 ‘행복’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정의가 가능한 추상적 관념이지만, 알랭 바디우가 설명한 사랑의 의미를 대입하면 올리브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그가 도시를 만든 건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사랑은 ‘둘에 관한 진리’이지만 릴리가 자신의 유토피아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한 타자는 자기 자신의 분신들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이는 소위 ‘이기주의’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릴리는 자신을 배제한 타인들을 적으로 규정했는데,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의 주된 적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이다.(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 71쪽) 그러니 릴리는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이기주의적 주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주의를 의도치 않게 실행하게끔 하는 강렬한 욕구의 정체를 우리는 알고 있다. ‘자아’는 평화를 원한다. 자신의 세계 안에 포섭해서라도 평화를 욕구한다. 그러나 사랑의 절차는 주체적인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 71쪽)이 바로 평화로운 유토피아에 사랑이 부재하는 까닭이다. 


릴리는 기존에 없던 세상을 창조했고, 이는 분명 주체적인 행위였으며, 그로 인해 일시적인 행복을 성취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성취에는 분명한 한계가 예고되어 있었다. 앞서 설명한 ‘행복의 주체’의 세 가지 특징, 그 가운데서도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주체는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릴리는 차별과 배제로 가득한 세상에 갇히지 않았을 뿐,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자기 자신을 가뒀다는 점에서 개방적인 주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랑은 그러한 개방성을 보장한다. 사랑은 주체들을 구별하며 분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정체성을 제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2016. 89쪽) 릴리가 ‘주체들을 구별하며 분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정체성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사랑은 ‘차이의 존재’를 중요한 전제로써 필요로 한다. 사랑은 ‘제거하는 과정’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제거가 필요 없는 무결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무결한 평화, 그것이 바로 무해함의 정체다. 사랑의 가능성이 부재하는 무결한 평화 속에서 그는 더 이상 변화의 주체일 필요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객체가 되기를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올리브는 무해한 포스트휴먼이라는 정체성이 부여된 채로 탄생했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변화의 꿈틀거림을 감지했고, 릴리가 그러했듯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탈경계했다. 그는 무해한 포스트휴먼 대신에 행복의 주체가 되었다. 올리브는 릴리와 달리 분리와 경계로부터 꾸준히 탈주했고, 그러한 면에서 “진리의 절차”(“저는 사랑이, 예컨대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제가 “진리의 절차”라고 일컫는 무엇, 다시 말해서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 51-52쪽)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52)라는 데이지의 말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따라서 릴리와 올리브 간의 실재적 행복의 주체화 여부를 가른 것은 이렇듯 ‘사랑’의 실천 여부였다. 세상의 진리가 으레 그러하듯, 사랑 역시 모순과 폭력의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2016. 72쪽) 그 사실을 외면해서는 온존될 수 없다. 따라서 모순과 폭력이 제거된 무해함은 행복뿐 아니라 사랑과도 대립항 관계에 있다. 


사람들은 무해한 주체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그들이 상상하는 무해함이란 결코 실현되지 못할 유토피아다. 좀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상처주지 않는 관계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그들 자신에게 유해하다. 사람들이 사유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무해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나와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화합할 것인가’이다. 무해함이라는 기준점을 설정한 채로 그에 적합한 사람만을 자신의 바운더리에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이를 어떻게 하면 투명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유가 필요하다. 여기서 차이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과 차이를 제거하는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가 비유컨대 올리브의 투쟁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릴리의 마을 건설에 해당한다. 이상을 꿈꾸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이상이 모든 악과 유해함을 차단하는 방향이어서는 위험하다. 유해한 타자는 무해함의 유토피아에서 설 자리를 잃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차이를 받아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적’ 자아와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무해한 유토피아에의 상상은 그들을 지구가 아닌 머나먼 행성 X로 데려가지만, 투쟁을 동반하는 사랑은 그들의 본원지에서 타자와 융화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무해한 유토피아의 거주민들은 결국 사랑과 행복을 찾아 다시금 지구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그 땅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무결해지겠지만 지구에는 온갖 유해한 것들끼리 조화와 다양성을 형성할 것이다. 사랑과 행복이라는 추상성이 무해와 구분되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오해들은 불식되어야 한다. 무해함은 기본적으로 모든 불화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즉 안전 규범에 의해 준비되고, 상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안전 규범들에 맞춰 사랑을 훌륭히 준비한 자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편의에 부합하지 않을 타인이란 존재를 곧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알랭 바디우는 말했다.(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 18-19쪽)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성립하기에, 타인이 부재하는 관계란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이 경우, 더욱 문제적인 것은 타인이 고통받는다 해도 그것이 나르키소스적 자아에게 있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사안이 된다는 것이다. 그 타인은 그저 현대성에 편승하지 못했을 뿐이니 그 사람의 문제는 오롯이 그 사람의 몫이다. 


이미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체념과 포기, 혹은 배타적 결속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쉽게 배척하고, 그러한 배척의 책임을 오롯이 그 사람에게 귀속시킨다. 미디어 매체에서는 연애 프로그램의 출연진을 향한 지나친 비난과 상대방을 향한 이해가 결여된 판단들을 관찰할 수 있고, 사회 운동을 향한 여론은 권리 쟁취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도덕적 결함을 이유로 ‘연대’를 철회하기도 하며, 나아가 그들이 권리를 주장할 명분까지 박탈해 버리기까지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무해한 속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남들 눈살이 찌푸려지게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자기 존재성이 보장될 만큼’ 이미 여러모로 안락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 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은 바꿔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무해’의 규범을 성실하게 이행할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이다. 타인과 어떤 식의 관계를 맺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 그러나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타인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무해함은 그저 환상이나 이미지로, 혹은 순간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텍스트의 무해함을 따지기 위해서는 타자, 공동체, 사회가 필요하다.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지, 누군가에게 폭력적이지 않은지 등을 다 함께 논의하고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의가 유해/무해로 소급되면, 이 기준은 쉽게 규범화와 만난다. … 무해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대중의 요구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요구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허윤, 「유해한 것에 대해 더 시끄럽게 이야기하자」, 『릿터』, 38권, 민음사, 2022, 23쪽) 언제나 피해야 할 것은 단순화의 함정이다. 단순한 것은 편리하다. 심지어 다수가 합의한 규범은 더욱 편리하다. 많은 사람들이 욕구하고, 또 실제로 많은 이상성을 내포하고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쉽게 안주해버린다. 무해한 걸 원하는 게 뭐 어떻냐는 말에, 과감한 비판의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다. 아마 순례자들이 그러했듯, 사람들은 언젠가 외부로부터의 깨우침이 없어도 저절로 무해의 환상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안 없는 깨달음, 즉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무력감에 빠지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의 의의는 앞서간 문제 인식에 있다기보다는 진실로부터 진일보한 낙관에 있다. 인류에게는 ‘사랑’이 있다는 것. 그것은 비록 고난과 고통과 비극을 동반할지라도 언제나 요동치는 가능성 그 자체이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중간과제 소논문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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