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빗구미입니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한 번쯤 밀려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도요.
이번 주에는 에이스가 아니어서 더 오래 버텨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슬로우 호시스> — 실패한 요원들이 모인 팀, 느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스파이 게임> — 현장을 떠났지만 판을 읽는 눈만은 남아 있는 사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가장 조용한 사람이 끝까지 의심을 멈추지 않을 때
잘난 사람들의 성공담이 아니라,
아등바등 버티며 판을 읽고, 질문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2026년 2월 첫번째
-<슬로우 호시스>, <청설>, <내 머리속의 지우개>
우리는 어쩌면 모두, 느린 말들일지도 모른다 - <슬로우 호시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애초에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태어날 때부터 에이스였던 적도 없고, 인생에서 한 번쯤은 제대로 미끄러졌고, 그때마다 어딘가 한 칸 비켜난 자리로 밀려나 왔다고. <슬로우 호시스>를 보면서 그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이 시리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계속 실패해온 사람들의 기록에 가깝다.
주인공 카트라이트는 MI5 요원으로 잘해보고 싶었던 인물이다. 의지도 있었고, 기준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다. 딱 그 정도의 어긋남. 그래서 그는 ‘슬로우 호시스’라 불리는, 조직 안에서도 애매하게 밀려난 팀으로 보내진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큰 결점을 하나씩 안고 있다. 판단이 느리거나, 과거에 실수했거나, 인간관계가 엉망이거나. 완벽한 요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이들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일이 터질 때마다 결국 해결하려고 아등바등 애쓴다는 점 때문이다.
이 팀의 수장인 잭슨 램은 특히 인상적이다. 한때는 에이스 요원이었지만, 지금은 배가 나오고 술 냄새를 풍기며 살아간다. 겉으로 보면 이미 끝난 사람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가장 먼저 숨겨진 음모의 냄새를 맡는다. 몸은 느려졌지만, 눈은 여전히 반짝인다. 수많은 경험이 쌓인 사람만이 알아보는 균열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젊음과 날렵함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판단의 감각은 남아 있다는 걸 이 캐릭터는 계속 증명한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묘하게 위로가 된다. 우리는 늘 빠른 말, 잘 달리는 말, 성과를 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슬로우 호시스>는 말한다. 느린 말이라고 해서, 쓸모없는 말은 아니라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뒤처진 채로 살아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오히려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위치를 자랑하는 인물들이 이 이야기 속에서는 하나같이 나쁜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 역시 흥미롭다. 서로를 싫어하는 것 같고, 신경질적으로 대하는데, 막상 위기의 순간에는 결국 서로를 돕는다. 완벽한 팀워크는 아니지만, 그 서툰 연대가 이상하게 따뜻하다. 이들은 영웅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넘어지고, 실수하고, 허둥댄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어설픈 후속 반응들까지 모두 보여준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 왠지, 나 자신의 하루와 닮아 있어서다.
무엇보다 이 시리즈는 첩보물로서도 꽤 재미있다. 화려한 액션 대신 상황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중심에 있다. 누가 진짜 적인지,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됐는지 서서히 드러나는 구조.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서민 첩보원’들의 이야기 같다. 대단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들.
<슬로우 호시스>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남는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한 번쯤 밀려난 사람들이고, 어쩌면 지금도 느린 말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 해보려는 의지. 실패해도 다시 움직이려는 태도. 그게 결국 삶을 굴러가게 만드는 힘 아닐까.
그래서 이 시리즈가 좋았다.
잘난 사람들의 성공담이 아니라,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 같아서.
그 속에서, 자꾸만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빠르지 않아도, 판을 읽는 사람은 남는다 - <스파이 게임>
젊을 때는 속도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빨리 판단하고, 빨리 움직이고, 결과를 먼저 가져오는 사람이 능력자로 보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알게 된다. 진짜 중요한 순간에는, 빠른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상황을 읽는 사람이 남는다는 걸. <스파이 게임>은 그 사실을 아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은 더 이상 현장에 뛰지 않는다. 몸은 느려졌고, 조직 안에서는 이미 정리 대상에 가까운 인물이다. 겉으로 보면 은퇴를 앞둔, 한물간 요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첩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건 총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계산과 숨겨진 의도라는 걸. 그래서 그는 직접 싸우지 않는다. 대신 판을 다시 짠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제한된 자원으로.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주인공이 영웅처럼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완벽하지 않고,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도 안고 있다. 젊은 요원을 보호하려는 선택 역시 순수한 정의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책임을 끝까지 짊어지려는 태도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집요하고, 계산적이며, 조금은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현실적으로 만든다.
이 모습은 자연스럽게 <슬로우 호시스>의 잭슨 램을 떠올리게 한다. 겉모습은 망가졌고, 조직에서는 무시당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흐름을 꿰뚫어보는 사람. 젊음은 사라졌어도, 경험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숫자로 평가되지 않는다. 서류에는 남지 않지만, 판의 결을 읽는 눈으로 남는다.
<스파이 게임>은 보여준다. 진짜 능력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고. 회의실의 말 한마디, 보고서의 문장 하나, 사람들의 미묘한 태도 변화 속에 답이 숨어 있다고. 그래서 이 영화에는 과한 액션보다 대화와 선택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진다. 총을 쏘는 장면보다, 버튼을 누르지 않는 장면이 더 긴장된다.
이 영화가 주는 묘한 위로는 여기서 나온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현장에서 밀려난다. 젊음도, 속도도,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모없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다른 역할이 시작된다. 직접 뛰지 않아도, 판을 망치지 않게 만드는 사람. 마지막에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 사람.
<스파이 게임>의 주인공은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다. 가장 잘나서가 아니라, 가장 오래 버텼기 때문에. 그리고 그 버팀은 요란하지 않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결과만 남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공담이 아니라 생존담에 가깝다.
우리는 지금 어떤 단계에 서 있을까. 아직 현장에서 뛰는 사람일까, 아니면 뒤에서 판을 읽어야 하는 사람일까. 어쩌면 중요한 건 위치가 아니라 태도일지도 모른다. 느려졌다는 걸 인정하고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걸 생각하게 한다.
조용한 사람들이 결국 진실에 닿는다 -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처음부터 친절하지 않다. 설명도 적고, 감정도 절제되어 있다. 인물들은 말을 아끼고, 표정은 굳어 있고, 사건은 느리게 진행된다. 그래서 처음엔 답답하다. 누가 주인공인지도 헷갈리고, 무엇이 핵심인지도 선명하지 않다. 그런데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된다. 이 느림이야말로 이 영화가 선택한 태도라는 걸.
이 영화의 중심에는 조지 스마일리가 있다. 화려한 요원도 아니고, 현장을 누비는 인물도 아니다. 이미 조직에서 한 번 밀려난 사람이고,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다. 그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결론을 서두르지도 않는다. 대신 사람을 오래 바라보고, 과거의 말들을 다시 꺼내고, 기억 속의 미세한 균열을 더듬는다. 첩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총을 든 상대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져서 의심하지 않게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슬로우 호시스>의 잭슨 램이 음모의 냄새를 먼저 맡는다면, 스마일리는 그 냄새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를 끝까지 추적하는 사람이다. 둘 다 빠르지 않고, 친절하지 않으며, 영웅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이들은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조직이 편안해하는 지점에서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고, 모두가 넘어간 사실을 다시 들여다본다.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배신이 특별한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대한 음모는 아주 작은 타협과 침묵에서 시작된다.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서. 그렇게 하나둘 눈을 감는 사이, 진실은 조직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는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말한다. 가장 위험한 배신은 언제나 조용하게 진행된다고.
그래서 이 영화에는 통쾌함이 없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박수 칠 타이밍이 없다. 오히려 씁쓸함이 남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동시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건 첩보물이라기보다, 조직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왜 불편한 진실 앞에서 침묵하는지, 왜 의심보다 안정을 택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스파이 게임>이 경험의 힘을 말한다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인내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빨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 태도, 확신을 유예하는 자세, 끝까지 판단을 미루는 용기. 이 영화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오래 버티며 의심을 지속한 사람이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이상하게 현실과 닮아 있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너무 복잡해서, 지금은 때가 아니어서, 괜히 나서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 말들이 쌓이면,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스마일리는 그 구조 속에서 혼자라도 멈춰 서는 사람이다. 모두가 지나쳐 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빠르게 판단하는 사람이 능력자처럼 보이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오래 의심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말해준다.
첩보의 세계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가장 필요한 사람은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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