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치 Feb 25. 2022

여자의 경멸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한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는 이상과 현실을 살아가는 범인과 예술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한창 꿈과 자아, 나다움에 심취해있던 20대 초반에 이걸 읽고서 나는 이제부터 겁나 달을 좇겠다면서 블로그 제목까지 'chase the moon'으로 바꾸고 온갖 창대한 에고에 빠져지냈던 기억이 있다. 뭐, 오늘은 그 얘길 하려는 건 아니고.


 소설 <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크게 동일시했던 인물이 있었다. 스트릭랜드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더크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 스트로브다. (프랑스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각각 디르크, 블랑쉬가 된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략하게 줄거리를 간추려본다. 평범한 가장이었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느날 갑자기 평생의 꿈이었던 그림을 위해 모든 삶을 뒤로하고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오직 그림을 그려야 되겠다는 열망뿐인 그는 파리의 가장 허름한 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데, 이 시기에 더크 스트로브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 더크는 우연히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보고 그 비범함에 매료되어 가난한 그를 돌보게 되는데, 심한 생활고를 겪은 스트릭랜드가 위독해지자 자기 집으로 그를 데려올 결심을 하게된다. 그리고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 된다.  

 

 평소 큰 갈등없이 남편의 말을 잘 따랐던 아내, 블란치는 거지나 다름없는 주제에 안하무인한 태도를 고수하는 이 남자, 스트릭랜드에게 극도의 경계와 적대감을 드러낸다. 더크는 아내의 이런 과민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스트릭랜드를 구해야할 사명감을 설파하며, 아내에게 그를 돌봐줄 것을 간청한다. 블란치는 결사반대하지만 남편의 애원에 못이겨 결국 승낙한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스트릭랜드를 간호한다.


 근데 일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야 만다. 스트릭랜드를 그렇게도 경계하고 피했던 블란치가 남편 더크를 두고, 스트릭랜드와 사랑에 빠져버린것이다. 기가 찰 부분은 이게 아니다. 도와주려고 데려온 거지놈과 아내가 붙어먹은 이 상황에 당장 둘을 내쫓아버려도 시원찮을 판에 남편 더크는 오히려 둘의 눈치를 보고 앉아있다. 오죽하면 자기가 집에 들어가면 둘이 편하게 있지 못해서, 오히려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세상에 이런 머저리가 다 있냐고. 어쩔거야 대체.


 오늘의 주제, '경멸'은 이 지점에 있다. 블란치는 잘못한게 없는데도 되려 쩔쩔 매는 남편, 더크를 경멸한다. 아내가 차가워질수록 남편은 더욱 고개를 조아린다. 여자의 눈치를 보고, 내연남에게는 마치 본인이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감춘다. 여자는 관심없는 남자가 순종해 올 때에 더없이 잔인해진다고 했던가. 본인의 윤리적 결함은 안중에도 없는지, 블란치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욱 뻔뻔해진다.





 오랜만에 <달과 6펜스>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있었던 어떤 해프닝때문이다. 사회생활 하면서 알게된 A가 나의 상향 평준화된 친절을 오해하고, 김칫국을 마셨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 나를 이성으로 대하기 시작한 A의 변화를 느끼고는 있었는데, 이러다 말겠지 하고 쉽게 넘긴게 화근이 되었다.


 사람이 참 얄팍해서, 웬만큼 하는 모양을 보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그 얕은 수가 다 보인다. A는 언제부턴가 평소와 같은 내 친절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너무 다가오지 말라는거다.(읭? 내가 언제?)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사람들 있는데서는 만나기 싫단다.(읭? 우리가 언제?) 제 딴에는 내가 이혼녀라는게 걸렸던 모양인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여동생 얘기를 꺼낸다. '이혼녀는 아예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마'라고 했단다. 근데 이걸 나한테 직접 전하자니 자기가 너무 나쁜놈같아서 그동안 말을 못했단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단다.


 이쯤되면 화가 나는게 아니라, 그냥 어이가 없다. 아 그랬냐.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좀 멀리 나간거 아니냐. 너의 생각은 잘 알았고, 근데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우린 그런 관계였던 적이 없고, 너는 나한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착각은 하지말고, 자연스럽게 멀어지면 될것같다고 했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이후로 내가 연락을 받지 않거나 데면데면 피했더니, 이제 갑자기 내가 귀해보이나 보다. 내 눈에 띄려고 빤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옷이며 신발 등 평소 내가 좋아하고 자주 쓰는 것들을 따라사면서 원래 있었다고 발뺌을 하더니, 내가 관심을 꺼버리자 회사 앞으로 찾아와(!) 나를 곤란케 한다. 한동안은 SNS를 주시하고 있다가 내 동선에 나타나서는 같이 오고 싶어서 기다렸다고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요컨대, 경멸을 부르는 행동이다.


 이게 약 두달 전부터 이따금씩 있어온 일인데, 강경하게 연락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더니 한동안은 잠잠하더랬다. 찌질함에 정통한 남사친이 말하길, 분명 그 남자는 다시 나타난다고 예언했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요 며칠전에 또 한번 연락이 왔다.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이성적으로 '좋게 말하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겠지. 험한 말 듣고싶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마' 라고 했더니 깨갱하고 사라지셨다. 만약 또 한번 내 시야에 나타나면 그때는 경찰을 부르든지 쏴 죽이든지(?) 할 생각이다.




아. 진짜.

경멸한다. 경멸해.









+소설 속 가정파탄의 결과는 직접 확인하시길. 진짜 재밌어요.

+읽는 사람이 다 PTSD걸릴 것 같은 얘기를 써서 조금 미안합니다.

+매번 침잠된 이야기만 쓰는 것 같아서 오늘 좀 바꿔봤어요.

+오늘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좋아요는 용치에게 에너지를 줍니다 히히






매거진의 이전글 오빠, 나는 네가 싫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