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누구야?”
“나! 내 이름이야.”
“뭐라고? 이게 엄마 이름이라고?”
“응”
“선희가 아니고?”
“응. 그건 가짜 이름. 이게 진짜 내 이름이야.”
“외택이가 뭐야? 이상하잖아. 선희가 더 이쁜데. 왜 외택이야?”
“외가에서 태어나 외택이야.”
“에~엥? 무슨 이름을 그렇게 지어?”
“앞으로는 다시 이 이름으로 살 거야.”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종이에 적힌 게 이름 같아 물었을 때, 엄마는 씩씩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땐 별게 다 창피하니까. 엄마한테는 선희가 더 어울린다며 볼멘소리를 했으나,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우리 엄마가 나를 임신하고 6.25 전쟁이 터졌어. 아버지는 전쟁터로 나가셨고, 엄마는 집에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외할머니네로 갔던 거야. 엄마는 하루하루를 눈물로 불안하게 보냈대.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첫아이니까 더 그랬겠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왼쪽 다리에 총을 맞았어. 이러다 자식 얼굴도 못 보고 죽겠다 싶어 이 악물고 버텼대. 그래서 내가 외가에서 태어났고 내 이름이 외택인거야.”
이름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이상 엄마 이름에 대해 투덜거릴 수 없었다. 그동안 왜 선희로 살았냐고 물었고 엄마는 자기도 외택이란 이름이 창피했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엄마이름이 많이 불리는 곳은 교회였다. 교회 외에는 딱히 엄마 이름이 불려질 곳이 없었다. 동네의 아줌마들은 첫 아이인 내 이름으로 엄마를 불렀다. 아줌마들이 은정아하고 부르면 날 부르는 건지 엄마를 부르는 건지 헷갈렸다. 교회게시판에 적힌 어른들의 이름 ‘숙자, 명자, 끝순’ 옆에 ‘선희’로 적혀 있던 엄마이름을 볼 때면 어깨가 으쓱해지며 자랑스러웠다. 우리 엄마 이름 이쁘지? 뭐 이런 느낌이었다. 교회 게시판의 엄마 이름이 외택이로 바뀐 후 친구들은 엄마이름에 대해 물었고 한 동안은 대답하는 게 싫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턴가 엄마이름에 담긴 사연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엄마는 선희에서 고향 같은 외택이로 돌아왔다.
엄마와 이야기 나눌 때 외할아버지는 진권 씨, 외할머니는 달순 씨로 부르곤 한다. 그렇게 부르면 노인이 아닌 젊은 그들이 성큼 다가와 현재로 느껴지고 그들의 삶이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이름은 한 편의 영화다. 그 영화에서 서로를 기다린 어린 달순 씨와 진권 씨 그리고 아이 외택이를 본다. 나는 이 영화의 덕후다. 이젠 달순 씨도 진권 씨도 이 세상에 없고 우리 엄마 외택이만 남았다. 그래도 엄마 이름 안에는 여전히 진권 씨와 달순 씨가 있고 시대의 어려움을 견디고 집 한 채 마련해 오순도순 사는 한 가정이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그 아이만의 집을 지어 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름에는 아이가 다른 누구가 아닌 자기만의 세상을 일구며 살 길 바라는 소망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부를 때 그것은 생기 있게 팔딱이는 무엇 같기도 하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스노클링 하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며 소멸되고 이름만 제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름은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진 것 같다. 세상을 떠난 사람과의 추억이 떠 올라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엄마는 속 깊이 물려받은 좋은 마음 지키며 일흔다섯 번째의 봄을 만났다. 나는 가끔 엄마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외택이 기특해라."라며 칭찬할 때가 있다. 장난 속에 진심을 담는다. “늙어도 나는 요새가 제일로 좋다, 제일로 좋아.”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다. 높고 가파른 산 같은 시절을 넘고 풀이 살랑이는 평지를 산책하듯 말한다. 엄마는 지금도 내 마음을 끌어안고 정성 들여 키운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해 줄 테니 말하라고 한다. 나도 엄마인데 엄마의 애정 어린 돌봄을 받고 산다. 나이 쉰을 넘긴 내가 엄마밥을 자주 먹으니 복도 많다며 부러워들 하고 난 부모복이 많다며 미소 짓는다. 달순 씨와 진권 씨에서 외택씨로 이어진 끈 하나가 내게도 이어져 있다. 그것은 아마도 생애를 바친 그들의 사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