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꽃 Feb 25. 2024

황금 보자기

기차가 마지막 역인 서울역에 도착했다. 가방을 메고 벗어 두었던 겉옷을 챙기며 두고 내리는 것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물건을 잘 흘리고 다녀서 그래야 한다. 기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한 여자가 황금색 보자기로 싼 짐을 기차의 계단에 놓은 채 느리게 내리고 있었다. 짐이 들고 내리기에는 무거워서 먼저 내린 뒤에 짐을 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도 저 보자기랑 똑같은 거 몇 장 있는데 생각하며 별겨 아닌 거에서 친밀감을 느꼈다. 선물이 정성스럽고 값지게 보이라고 포장용으로 흔하게 사용되는 보자기다. 그 생각을 잠깐 하다 내가 들고 내리는 것이 빠를 것 같아 짐을 들었을 때 여자가 막 돌아서고 있었다.

"아이고, 무거울 텐데. 고마워요."

"진짜 무겁네요."

"이거 다 반찬이에요."

"그럴 것 같았어요. 맛있는 냄새가 나요."

"그래요? 냄새가 났나 보네. 어쩌나?"

"뭐 어때요. 이미 내렸는데."

"그러네. 하! 하! 하! 고마워요. 잘 가요."


그녀가 보따리를 들고 내게 등을 보이며 걷기 시작했다. 걷는 모양을 보니 다리가 불편한 게 분명했다. 보따리를 들고 기차계단을 내려갈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해졌다. 무거운 보따리를 드느라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절룩거리는 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난 앞지르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보자기 바닥의 한쪽 귀퉁이가 붉게 물든 게 눈에 들어왔다. 넉넉히 담은 반찬의 양념이 넘쳤을 것이다. 반찬 냄새의 이유가 저거였나 보다 했다. 뽀글거리는 파마머리, 퉁퉁한 몸매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웃집 여자의 모습이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모든 것이 남다른 아름다움으로 느껴져 서둘러 지나쳐 가기엔 아까웠다. 그녀를 좀 더 내 안에 담고 싶어졌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이럴 때 가져다 써도 괜찮겠지 싶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젊음의 아름다움은 죽었다 깨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내공이 쌓인 외유내강의 아름다움이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보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인 반찬통 안에는 어떤 반찬이 들어있을까. 몇 시부터 준비해 서울 오는 이른 기차를 탔을까. 누구를 위해 이 수고를 감당하는 걸까. 이것저것 궁금한 게 생겨났다. 마음 같아서는 보자기를 풀어 반찬통 열고 밥 한 그릇 배불리 먹고 싶었다. 식도로 넘어가는 음식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뒷모습이 하루 종일 잊히지 않고 떠올랐다. 그녀는 내 앞에서 담담하게 걷고, 나는 느슨한 마음으로 따라 걸었다. 그녀에게서 신을 느꼈다. 신이라면 저 여자처럼 사랑하겠구나 생각했다. 덕분에 마음이 따듯했고 내내 미소가 지어지는 좋은 하루였다. 그 반찬을 받은 사람은 좋았겠다. 그날 횡재했으니까 말이다.


남을 위해 음식 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마음은 존경에 가깝다. 나의 요리를 생계형 요리라고 이름할 만큼 요리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날 위해 요리를 하면 대단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저 좋아서 한다지만 받는 마음은 황송할 따름이다. 음식을 하면 내 얼굴이 둥실 떠 오른다던 k는 백반 한상 배달하듯 쟁반대신 큰 대야에 담아 가져다 주기도 하고, 그녀의 집으로 초대해 한 상을 거하게 차려주곤 했다. 그녀 덕분에 제철에 먹을 수 있는 시골밥을 계절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어릴 때 먹었던 시골음식이라면 밥 두 공기는 너끈히 먹어치웠다. 내 첫인상이 날카로워 보였는데 먹음직스럽게 밥 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며 밥 해주는 맛이 난다고 했다. 


내 음식 솜씨가 생계형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건 ‘실망하여 놀랄 수 있으니 주의하시오.’라는 우스꽝스러운 안내글 같은 것이다. 주부경력 25년 가까이 되는데도, 내가 칼질한 재료들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도마를 내려다보며 ‘음... 이게 이 모양이 아닐 텐데...’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도 어쩌랴. 식구들 밥은 먹여야 하니. 어릴 때 소꿉놀이도 재미없어 안 했던 내가 음식을 하는 건 어설프지만 가족에 대한 찐 사랑이다. 식구들이 음식점에 들어와 주문하듯 용감하게 메뉴를 외칠 때가 있다. 

“엄마, 볶음밥 해주면 안 돼?”

“안될 건 없지요.”

“계란국도 먹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완성된 볶음밥을 들여다보며 ‘캬~ 모양이 상당히 창의적이야.’ 한다. 완성된 볶음밥을 계란국과 함께 아이 앞에 놓고 맞은편에 앉아 관심 없는 척하며 아이의 눈치를 살핀다. 

“음~ 맛있다.”

“그래? 맛있어? 듣기 좋군.” 

한쪽 팔꿈치를 의자등받이에 걸고 거드름을 피운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가 뒷정리를 하며 씨익 웃는다. 나의 주방에는 듬직한 협력자인 굴소스와 코인육수가 있다. 이 두 가지면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대기업의 오랜 연구와 투자 끝에 만들어져 내 주방에 온 여러 양념 덕분에 나도 가끔은 음식의 신이다. 남편이 퇴근하면서 미리 연락을 해, 장 봐와서 저녁을 한다고 하곤 하는 건 내가 밥 할까 봐 무서워서 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친구들에게  "우리 식구들은 내가 밥 할까 봐 무서워하는 것 같아." 하며 같이 웃은 적도 있었다. 식구들이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하더라도 요리하는 게 재미있어지지 않으니, 내게 밥 해주는 사람은 앞으로도 쭉 신의 선물 같을 것이다.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이다. 황금보자기의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이 사랑이 아닐까. 사랑하면 귀찮아도 번거로워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기어코 해내고 마니까. 사랑하면 그렇게 되니까. 그녀에게서 느낀 사랑은 뜨듯한 사랑이다. 뜨거운 사랑은 열기 때문에 오래 못 가 뒷걸음치게 되지만 뜨듯한 사랑은 오래도록 곁에 머물고 싶게 한다. 뜨거운 사랑보다는 뜨듯한 사랑이 더 좋다. 그런 사랑을 받아먹으면 허기가 채워져 살아갈 힘이 생긴다. 사는 동안 사랑의 영양실조는 걸리지 않으면 좋겠다. 마음의 가난은 팍팍하고 슬프니까. 다행히도 우리는 서로에게 소나기처럼 사랑을 내려주며 살고 있다. 소나기가 늘어졌던 식물이 다시 꼿꼿하고 생기 있게 빛나도록 돕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한차례 씩 그래주기에 다시 마음을 일으켜 세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서로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안녕, 키다리 아저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