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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Jan 03. 2024

뛰지 말고 꼭 걸어 다녀

내가 살던 동네는 지은 지가 25년이 훌쩍 지난 오래된 아파트이다. 몸집이 큰 나무는 듬직했고 그 나무들이 피우는 꽃들은 품격 있는 우아함으로 아름다웠다. 봄이면 제비꽃, 민들레, 냉이꽃, 양지꽃, 봄까치꽃까지 씨 뿌리지 않은 야생화가 한 마을에 살듯 화단에 같이 피어났다. 나는 새것의 때깔을 오래전에 벗어던진 우리 동네를 좋아했다.      


아파트단지 내의 각동마다 계단 청소를 담당하는 환경미화원이 있었다. 우리 동을 담당하는 미화원은 여든을 바라보는 여자였다. 그녀가 목에 두른 수건으로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꾹꾹 누르며 계단신주 닦는 모습을 보고 놀란적이 있다. 할 일이 있어서 살맛 난다던 그녀의 말이 떠 오르며 그 열심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시간에 쫓겨 뛰는 게 일상인 내게 그녀는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겨우 펴며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아이고, 또 뛰어? 걸어 다녀요. 넘어져 다치면 일찍 가 뭐 한대. 큰일 나." 

"그러니까요. 근데 그게 잘 안 돼요." 

하며 웃으면

"걸어가. 걸어." 

목을 쭉 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몇 번 들었던 그 말이 어느 아침에는 남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사는 것도 서두르지 말고 안달복달 말고 하루치씩 사는 거라고 하는 듯했다. 그 생각이 떠 올랐을 때 마음이 진지해지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는 가까워져 상추도 나눠먹고, 더울 땐 시원한 물한 컵씩 건네며 "이참에 잠깐 쉬었다 하세요." 하고는 물 마시는 동안 수다를 떨곤 했다.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사람, 나무, 꽃들은 여유롭게 시간을 걸음 하며 산다. 얼마 전 그 아파트를 떠나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삿날 아침에도 청소하는 그녀를 만났다. 인사할 수 있어서 그랬나 무척이나 반가웠다.

"저 오늘 이사해요." "

"아이고, 그래? 잘 살아. 건강하고 부자 되고."

 "네. 감사해요." 하며 꼭 끌어안았다. 

"건강하세요." 말하면서 꼭 그러길 바라는 진심이 우러났다.

 "딸같이 좋았는데, 서운하네." 

"저도 그래요. 정들었나봐요. 안녕히 계세요." 하며 등을 돌려 걷는데 

"뛰지 말고 꼭 걸어 다녀요." 하는 진심 담긴 목소리가 뛰어들어와 마음을 가득 채웠다. 

"네. 하! 하! 하!" 밝게 웃는 것으로 답을 했다.      


우리 사이가 좋은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앞으로 못 보더라도 우리는 계속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주고받은 마지막 말을 지키고 싶어 졌다. 뛰지 말고 천천히 걷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고 그녀가 오랫동안 건강하고 살맛 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진심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헤어지며 새로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헤어짐이 만남이 되기도 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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