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에 모든 가족이 무사히 도착했다. 다소 시니컬하면서도 쿨해 보이는 출입국사무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휙 던져준 여권에 아빠가 다소 불쾌함을 표했지만 내심 해외여행에 긴장도 설렘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사실 3대가 함께 다시 해외여행을 출발한 건 4년이지만 그 사이 효녀 코스프레에 단단히 빠진 동생은 엄마, 아빠 둘이라도 모시고 해외를 다녀와야겠다며 나섰다. 따지고 보면 폐소공포증 사건 이후 동생이 부모님 모시고 한차례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 김해공항 폐소공포증 환자 사건 1년 이후 한여름 시원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겠다며 동생의 효녀 프로젝트는 본격화되었다. 사실 썩 내키지도 않고 사위도 썩 즐거워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같이 가기는 어렵겠다 싶었다. 그렇게 아빠의 환갑 평생 첫 해외여행은 블라디보스토크가 되었다. 비록 첫째 딸과 사위, 외손주는 빠진 여행이었지만, 둘째 딸의 효심에 늙은 부모님은 그렇게 첫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좋다는 곳은 다 다녀왔지만, 그 반응은 영 뜨뜻미지근했다. 여전히 아빠는 해외에서도 머 볼 것도 없다. 춥다. 등의 평을 이어갔기에 아 아빠는 정말로 해외여행에 관심이 없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친정엄마는 본인의 취미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즐겼다. 여행지를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지만 여기도 좋다 저기도 좋다. 그렇게 친정아빠의 첫 해외여행은 성공했다. 물론 처음 시작과는 다른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어딘가 다녀온 게 어딘가.
사이판의 공기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아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후끈했다. 이미 새벽 시간이었고 숙소로 픽업 차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은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습기 가득하고 따뜻한 바람이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코로나로 다들 끼고 있던 마스크를 아주 잠시 벗어던지고 사이판 새벽 공기를 맡았다. 드디어 가족 전체가 처음으로 같이 해외여행을 온 순간이다. 하나하나 단합은 전혀 안 되고 서로에게 불만투성이지만 이 시만만큼은 그저 반가웠다. 늦은 시간에도 소주를 찾는 아빠를 위해 작은딸은 캐리어에 소주와 라면을 준비해 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도 김치에 소주만 찾았다는 아빠를 위해 아직 시집가지 않은 작은딸은 효녀 심청이었다. 실로 늦은 나이에 둘째 딸을 얻었다. 그러다 보니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이다. 어쩜 그녀가 더욱 강력하게 삼대여행을 밀어붙인 덕분에 모든 이가 사이판 호텔에 다 함께 와있는 것일 게다.
몇 시간 잤을까 본격적인 사이판 일정이 시작되었다. 가게를 문 닫고 길게 빠지면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줄 아는 아빠 일정에 맞춰 주말을 끼워 3박 5일 일정이다. 얼추 주말을 끼고 앞뒤로 조금 일찍 문을 닫고 조금 늦게 문을 열어주는 최소한의 양심 일정. 그러니 짧은 스케줄을 위해서 잠은 사치였다. 동이 트자 부지런히 조식을 챙겼고 조금이라도 더 자는 사위, 손주와 함께 본격 사이판 여행을 나선다. 창문사이로 보이는 사이판의 바다가 눈이 부시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처음 본 친정 부모님은 오랜만에 서로에게 다정하다. 날씨도 좋았고 호텔의 위치도 좋았다. 가라판 거리를 오가는 동안 코로나 걱정은 조금 덜었다. 첫날 스케줄은 여유롭였고 낮에 점심 먹고 저녁에 선셋크루즈 정도로 일정이 잡혀있다. 다양한 주류가 서비스로 제공되는 선셋크루즈에서 통기타로 노래를 부르니 흥이 올라온다. 친정 아빠는 적당한 취기와 여행이 제법 신나 보였다. 외국인에게도 서슴없이 다음 잔을 요청했다. 그래 여행은 자고로 술이 빠질 수 없지. 숙소에 돌아와서도 늘 맥주 한잔을 하고 자는 여행의 패턴에 아빠가 합류했다. 늘 먼저 잠자리에 누우러 가는 친정엄마도 슬쩍 오늘의 소감을 위해 한자리를 차지했다. 어쩌면 별거 아닌 여행인데 참 많이 뜸을 들였구나 싶다.
다음날은 마나가하섬에 간다. 날씨가 흐리고 아침에 비가에 와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하게도 마나가하섬에 들어가니 화창해진다. 진짜 에메랄드빛 바다를 처음 만난 부모님이다. 아빠는 태어나 처음 받아 든 스노클링 마스크로 간단하게 방법을 익힌 후 마나가하섬을 열심히 다닌다. 아빠가 스노클링을 그렇게 즐거워할 줄 몰랐다. 쉬었다가 또 하러 간다. 마나가하섬 한 바퀴 걷는 것에도 토 달지 않는다. 뭐 하러 걷냐, 뭐 하러 가냐, 뭐 볼 거 있냐, 소리는 이미 진즉 사라졌다. 투덜이 파파스머프에 버금가던 아빠는 마나가하를 즐기기에 바빴다.
사십 평생 아빠는 그저 술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빠는 물놀이도 좋아하고 스노클링도 재미있어하는 사람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아빠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궁금해해 본 적이 없다. 아빠 취미생활이라 해 봐야 매일 아저씨들과 만나 술 마시는 게 전부였다. 아빠의 취미는 술, 특기는 담배. 잠깐 그걸 내려놓고 스노클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4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싶었다. 아빠는 우리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몰라준 것 같다. 엄마는 여행은 가고 싶었지만, 그냥 가만 앉아 있는 것이 좋은 사람이다. 물놀이는 영 취향에 맞지 않다. 어린 둘째 딸이 스노클링은 해봐야 한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그저 서서 허리만 숙이고 머리만 박는다. 본인 발 밖에 보일 리가 없다. 바다에 몸을 맡기도 둥둥 떠올라야 지난 전혀 되는 게 없다. 제대로 놀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왜 맨날 해외여행을 가 자고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만 걸으면 다리 아프다 아직 멀었나 소리는 물론이고 스노클링 하러 여기 왔는데 한번 물에 머리 넣고는 그 뒤로 더 이상 해볼 생각도 없다.
정작 여행 안 간다 가기 싫다. 너희끼리 가라 했지만 기대 이상 즐겁게 놀고 있는 아빠. 맨날 가고 싶다 여기도 저기도 너희 간데 거기도 가고 싶다고 더 늙기 전에 가고 싶다 노래하던 엄마는 정작 나와서 본인 빵떡 같은 얼굴 사진만 가득 그늘에 앉아 찍고 있다. 마음에 안 든다. 얼굴만 찍어 혼자 볼 거면 동네 집뒤에서 찍지 뭐 하러 여기 더워빠진 마나가하섬까지 와서 땀을 빠작빠작 흘리면서 저러고 있나 싶다. 하나하나 첫째 딸의 잔소리 소재들이지만 참는다. 3박 5일 간만 참기로 한다. 물론 얼마큼 견뎌야 할지는 모른다.
아빠는 그날 이후 스노클링의 매력에 푹 빠졌다. 산악회에서 계곡 간다는 그날에도 아빠는 스노클링 마스크를 챙겼다. 그리고 에메랄드빛 마나가하섬 바다에 수많은 물고기 떼만큼 아빠의 술상에도 늘 아름다웠던 바닷속의 이야기들로 이어갔다. 생각보다 아빠는 여행을 많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여행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늘 여행 갈 때마다 태클 거는 아빠가 문제인 줄 알았는데 사실 복병은 늘 가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였다. 아빠 뒤에 숨어 아빠를 핑계 대고 아빠 밥, 아빠의 취미를 대변하며 까칠이로 만들고 있던 게 사실은 엄마였던 것이다. 본인이 걷기 싫고 본인이 배고프고 사실은 아빠가 싫었던 게 아니라 정작 엄마가 투덜이었던걸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데. 사실 내가 여행이 싫었던 건 아빠가 아니라 엄마 때문이었다는 것을 왜 인지하지 못했는가. 아빠와 여행은 생각보다 수월했지만 정작 늘 여행에 목말라하던 엄마와의 여행이 세상 만렙이었던 것을 인제야 알게 되었다.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제 진정한 까칠이 첫째 딸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 친정엄마와 여행은 이런 거였다. 절대 평화로울 수 없는 조합. 그러니까 우리 친정엄마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