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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cial Scientist Nov 26. 2019

[책]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 최태섭

This is unfair!

1960-70년대의 시대정신은 '잘 먹고 잘 살자'였고, 1980-90년대의 시대정신은 '민주화를 이뤄내자'였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아마 '정의'가 아닐까. 부당함, 부정의 그리고 억울함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가로지르는 보편적 감정이 되었다. 이 책은 바로 이 '억울함'의 시대정신을 파헤친다. 


왜 우리는 억울할까? 나는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다고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건 아니다. 장애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 여타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적 지위의 변동에 예민하다. "사회의 저울추가 평등을 향해 꿈틀 하기만 해도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기 시작한다"라는 저자의 일침에 뜨끔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 또한 억울했다. 예컨대, 공기업의 '지역 인재' 할당이 그랬고, 특목고/자사고 폐지가 그랬다.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공부를 해서 지역 특목고에 진학했다. 그곳에서도 공부를 해서 서울의 좋은 대학을 다녔다. 평등을 더 추구하는 정권이 들어서고 나는 갑자기 억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19년을 내리 살았고 공부 하나 잘해서 서울에 간 나는 왜 '지역 인재'가 아니란 말인가.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았고 생활수준도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친구들과 비슷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다녔던 특목고가 '차별'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폐지돼야 마땅한가. 이쯤 되면 공부를 잘했던 것에 대한 '역차별'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내가 이뤄낸 거라 여겨온 것들은 온전히 내 능력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다. 부모님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기득권 위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쌓아 올린 것들이었다. 하나의 특권적 경험은 연쇄적으로 다음의 특권적 경험을 낳는다. 어릴 때 해외에서 거주해본 덕분에 특목고에 진학할 수 있었고, 특목고에 진학했기 때문에 서울의 좋은 대학에 붙을 수 있었다. 내가 특별하고 잘나서 혹은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현재의 타이틀을 얻어낸 것이 아니다. 그런 내가, 기득권이라는 단단한 기반이 없었던  사람들이 정책적 디딤돌을 딛고 조금씩 올라오려 하자 역차별 운운하며 억울해했던 것이다. 


가진 게 '지위' 밖에 없는 경우 '억울함'은 더욱 강력해진다. 가진 게 '남성'이라는 지위밖에 없는 일부 사람들은 더욱 격렬하게 '82년생 김지영'이 판타지이며 '62년생' 쯤은 되어야 차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진 게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라는 지위밖에 없었던 일부 사람들이 특히 더욱더 열성적으로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을 위한 정책에 반대하며 브렉시트 찬성을 하고 트럼프를 뽑았다. 문제는 억울함이 지나간 공간엔 '자기 방어적인 냉소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노력을 대체하는 혐오'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덜 억울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 번째로, 우리가 가진 것들이 특권이 아니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특권은 '가해'와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유리함을 누리며 부당함에는 무지하거나 침묵할 뿐이다. 그래서 특권을 누려온 이들은 자신들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상황이 억울하다. 어쩌다 가지고 태어난 특권 덕분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억울함보단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특권에서 나왔던 혜택을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우리의 지위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자.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이 경쟁은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위해 문턱이나 계단을 없애는 게 비장애인의 이동권을 빼앗는 게 아닌 것처럼,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이들의 기본 권리를 위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게 나머지 사람들의 기본 권리를 해치는 게 아닌 것처럼, 여성의 임금을 같은 일을 하는 같은 직급의 동료 남성의 임금 수준으로 올리는 게 그 동료 남성이 기존에 받던 임금을 낮추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뜨끔' 포인트>


"나는 '차별'받는 소수자라고 적으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수많은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자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외쳤다. 예전에는 성소수자, 장애인, 여자들을 함부로 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잘못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자신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권의 본래 뜻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것이지만, 현실의 인권은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정규직을, 빈민을, 장애인을, 성소수자를, 여성을, 유색인종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경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촛불과 그 이후의 상황들에서 나타난 것은 변화에 대한 고민보다는 '우리'가 권력을 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비협조자'들에 대한 서슬 퍼런 협박이었다."


"오용과 사유화를 반복하기만 하면, 개념은 더 이상 어떤 것도 비추지 못하고 추락하고 만다. 싸움은 시작부터 불공평하고, 승리는 이죽거리는 자들의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것이 점점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채용 과정은 점점 오디션으로 변해가고, 자발성, 열정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이들을 가차 없는 탈락을 통해 처벌하기 시작한다." 


"광장을 좁게 만드는 것은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다른 동료 시민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지워가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정권을 수백 번 바꿔낸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즉, 이 모든 시국이 끝난 뒤에도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면 그것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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