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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cial Scientist Jan 03. 2020

[책]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 강원택

독재부터 촛불까지, 대한민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2년 전 유럽에서 정치학 석사를 할 때 가장 많이 고민했던 지점은 바로 서구에서 생겨나고 발전한 여러 정치학적 개념들이 어떻게 한국적 맥락에 적용될 수 있을지였다. 강원택 교수님이 쓰신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같은 책이 그때도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박사 과정 입학을 눈 앞에 둔 지금에라도 읽어서 다행이다. 이 책은 지금의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국정치학 대중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책의 전체 내용을 개괄하기보단 1부의 내용만 요약하도록 하겠다. 이 글을 읽고 더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1부: 대통령, 한국정치의 드라마틱한 주인공

2부: 선거, 격변을 예고하는 중요한 시그널

3부: 정당, 정치의 역사를 쓰다

4부: 민주화, 일상에서 '촛불'을 만나다


1부: 대통령, 한국 정치의 드라마틱한 주인공

한국 정치 체제는 굉장히 독특하다. 대통령제라고 하기엔 내각제적이고, 내각제라고 하기엔 대통력제적이다. 특히 한국의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 저자는 1부에서 한국이 왜 이런 체제를 갖게 됐는지를 역사적으로 서술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된  한국의 정치 체제는 임시정부와 해방 이후의 시기를 거쳐 오면서 형성되었다. 특히 1948년 총선거 이후 대한민국의 첫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설립된 헌법기초위원회와, 당시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던 이승만 사이의 대립과 타협이 결정적이었다. 당초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정부형태로 내각제를 채택했으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좌파는 물론 김구 등 민족주의 우파, 김규식 등의 중도파가 단독정부 수립에 불참한 상황에서 이승만마저 참여를 거부한다면 정치적 정당성의 면에서 심각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헌법기초위원회는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혼합형적 타협안을 최종적으로 채택하게 된다. 


헌법 제정 후 실시된 제1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국회의원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됐다.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한 것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의 대통령제는 지금의 제왕적 모습과는 달리 처음에는 견제받는 대통령제였다. 제헌헌법에서 의도했던 견제받는 대통령제는 이승만의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으로 인해 점차 대통령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형태로 왜곡되어 갔다. 큰 틀에서의 혼합적 특성은 유지됐으나,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 대통령 개인의 권한이 제도적으로 강화되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역시 권력의 중심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1987년에 헌법 개정을 주도했던 정치인들은 유신 이전 상태의 1962년 헌법을 모범 답안이라고 여겼다. 즉, 유신 이전으로의 회귀가 곧 정상화고 민주화였다. 물론 1962년의 헌법으로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유신과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 강화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축소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현행 87년 헌법에는 제헌, 유신 이전, 유신, 제5공화국을 포괄하는 한국 정치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무회의, 집권당 같은 제도적 기구가 아닌, 청와대 비서실 등의 사적 조직에 의존하는 통치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특징이다. 청와대 비서들과 대통령의 관계는 법률이나 제도가 아닌 '대통령 개인의 신임'에 기초한 관계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뜻'이 가장 중요해진다. 청와대에 주어진 인사권이 너무 광범위한 것 또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하는 요소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적으로는 제왕적인 대통령이 '정책적'으로는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국회는 다수결보단 합의제 방식에 의해 운영되는 경향이 있어서 야당과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법안 통과는 쉽게 되지 않는다. 때문에 대통령의 정당이 국회 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 '제왕적' 대통령에겐 정작 필요한 정책이나 법안을 추진할 힘이 없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에서 공을 들여 추진한 정책들을 모조리 폐기해버리는 것도 문제다. 정책 기조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정책의 단절은 결국 국민들의 손해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대통령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하루아침에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4년 중임이든 7년 단임이든,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이러한 문제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 체제가 바람직할까?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그동안 개헌 논의에서 종종 제시됐던 미국형 대통령제, 내각제, 이원 정부제 등과 같은 서구 국가들의 제도를 가져오기보다는, 우리 정부 형태에 대한 역사적 이해 속에서 대안을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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