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ding Insult to Injury
가장 포용적인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과연 무엇인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는 이 시대의 정의(justice)를 둘러싼 정치철학자들 간의 토론을 담은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롤스나 샌델 류의 정의론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정의(justice)의 중심축이 분배냐 인정이냐'하는 문제는, 현재 한국에서의 사회적 정의에 관한 논쟁을 이해하는 데에도 잘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토론에 불을 지핀 낸시 프레이저의 주장부터 살펴보자. 원제인 'Adding Insult to Injury'에서도 알 수 있듯, 프레이저는 기존의 정의 담론이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손상인 사회경제적 부정의(injury)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추가적으로 정체성, 생활방식, 사회적 기여도를 폄하하는 문화적 부정의(insult)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적 부정의는 '무시'이자 '사회적 종속'이다. 이는 누군가를 상대적으로 존중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구성하는 제도화된 문화 가치 패턴 때문에 발생하며, 개인이 사회생활에 동등한 동료로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 동성 파트너십을 불법적이고 변태적인 것으로 결혼에서 제외시키는 혼인법, 싱글맘을 성적으로 무책임한 식객 정도로 낙인찍는 사회복지 정책, 인종적 특징을 가진 사람을 범죄와 연관시키는 인종 프로파일링 정책 등이 '제도화된 문화 가치 패턴', 즉 문화적 부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의는 정치 경제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재분배 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단순히 편견을 제거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남성 중심적 규범은 차별하고자 하는 편견과 의도가 없을 때조차도 여성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프레이저는 참여 동등을 방해하는 문화 가치 패턴들을 탈제도화하고, 그 패턴들을 참여 동등을 촉진하는 패턴들로 대체함으로써 종속을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정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를 포용하는 이 정의의 개념에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사회경제적 부정의에 대한 해결책은 재분배(redistribution)다. 재분배의 목적은 집단 특수성을 유지하는 경제질서를 폐지하는 것이다. 반면 문화적 부정의는 집단 간 차이를 긍정하는 인정(recognition)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경제(재분배)와 문화(인정) 간의 딜레마를 이해하기 위해 '젠더 부정의'를 예로 들겠다. 젠더 부정의는 남성성과 연계되어 있는 특징들에 특권을 부여하고 여성으로 코드화 된 것들을 평가절하할 때 발생한다. 이 젠더 부정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재분배 논리에 따르면 젠더를 폐기하면 된다. 한편, 인정 논리에 따르면 젠더 특수성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한편, 경제와 문화는 상호 침투적이다. 경제 요구가 인정이라는 숨겨진 의미를 가지며, 문화 요구가 재분배적 함의를 갖는다. 잘못된 분배 때문에 동료로서 타자와 상호작용하며 무시받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 부족할 수 있다. 반대로 일반 남성 평균 키에 맞춰 제작된 사다리에서의 등판 속도를 기준으로 한 소방관 구직 절차처럼, 어떤 사회경제적 부정의는 집단 차이를 인식하지 못해서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재분배와 인정의 두 차원을 어떻게 중재할 것인가에 있다.
이러한 프레이저의 주장은 정치철학 및 비판이론 학계에서 활발한 토론을 이끌어냈다. 그중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두 학자의 의견을 소개하겠다. 우선, 엘리자베스 앤더슨은 프레이저와 달리 분배 부정의의 맥락에서 문화적 인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미국 대학의 신입생 선발 과정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적극적 우대 조치'로 인해 유색인종이 특별 대우는 받는 특권 수혜층으로 표현되는 백래쉬를 낳으면서 결과적으로는 '인정'을 약화시켰다고 말한다. 이러한 백래쉬, 즉 반발적 무시는 미국의 인종 구분이 경제 계급적 차원을 구성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백인의 낙인은 인종적인 카스트와 같은 위계를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표현하는 것이지, 원초적 문화적 차이에 대한 편견 섞인 반응이 아니기 때문에 재분배 차원의 맥락이 더 우선돼야 한다.
한편 레너드 C. 펠드먼에 따르면, 프레이저의 경제와 문화를 포괄하는 이론에 정치적인 차원을 추가해야 한다. 그는 국가가 어떻게 종속을 더 확고히 하면서 참여 불평등을 심화시키는지 묘사한다. 국가는 온전한 성원과 종속된 성원을 정치적으로 차별화해서 온전한 성원을 티 나지 않는 규범으로 만든다. 때문에 국가에 대해 집단 간 차이를 인정하라는 요구는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생겨난 그 차이에 대응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과제인 것처럼 여기게 한다. 즉, 법이나 정책 담론에서 구성되는 '차이'가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사실로 간주되고, 국가는 이러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은 차이가 규정되고 제도화되는 정치 과정에 대한 관심을 차단한다. 예를 들면, 공적 공간에서의 구걸과 노상을 겨냥하는 형법은 모두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숙인들을 낙인찍는 법이다. 실제로 노숙인들은 국가가 '인정'한 종속된 법적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프레이저는 경제(재분배), 문화(인정), 그리고 정치(대표 representation)의 세 차원으로 구성된 정의의 틀을 새로 구성했다. 글로벌 시대가 도달하기 전에는 정의에 대한 논의가 근대 영토 국가 내에 한정되어 있었다. '재분배냐 인정이냐' 하는 문제는 한 사회 내에서 사회적 관계를 공정하게 하기 위해 경제적 불평등과 제도화된 무시 중 '무엇'이 고려돼야 하는지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화를 거치며 문제의 쟁점이 '무엇'에서 '누구'로 확장되었다. 때문에 누가 재분배나 인정 요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원 자격과, 그런 요구가 어떻게 제기되고 판결되는지에 대한 공적 절차를 결정하는 정치적 차원이 추가되어야 한다.
프레이저의 최종적 정의론을 정리해보자. 사회적 정의란 '참여 동등'이다. 고로 부정의는 사람이 동료로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제도화된 장애물을 말한다. 이 장애물은 경제적 구조(잘못된 재분배)일 수도, 제도적으로 위계화된 문화 가치(무시)일 수도 있다. 이때 정치는 분배나 인정 투쟁의 무대로, 공정한 분배와 상호적 인정을 허락받는 범위에 누가 포함되고 배제되는지 알려준다. 때문에 정치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부정의는 대표 불능(misrepresentation) 혹은 잘못 설정된 틀(misframing)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부정의를 해결하기 위해 'all-affected principle'에 호소하는 '변혁적 틀 짓기의 정치'를 제안한다. 즉, 정치는 공통 구조나 제도의 틀에 영향받는 모든 사람들이 정의의 주체로서 도덕적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