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4인 가족이 옆자리에 앉았다. 식당은 비교적 조용했고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딸과 그보다 두어 살 위로 보이는 아들, 부모는 젊고 지적으로 보였다. 얼핏 듣기에, 3.1절로 이어지는 연휴 계획을 짜는 것 같았다. 들으려고 들은 것도 아니고 보려고 본 것도 아닌데, 귀가 솔깃해졌다. 바로 이런 대화 때문이다.
“근데 엄마, 삼일절은 뭐 먹는 날이야?” (막내 딸)
“응? 글쎄…” (당황한 표정의 엄마, 니가 답하라는 듯 남편을 바라본다)
“바보야, 삼일절은 뭘 먹는 날이 아니라구.” (위기를 넘겨주는 오빠)
“삼일절도 쉬는 날이잖아.” (또랑또랑 막내 딸)
그때 음식이 나왔고 부모는 대답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 아이가 집요하게 캐물을 것만 같았다. 내가 저 질문을 받았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고민이 밀려오면서 뒤통수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 가족은 연휴가 오면 외식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은 듯하다. 설날에 떡국을 먹고 추석 때 송편을 먹듯이 동지에는 팥죽을,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생활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까(추측이 너무 지나치다 여길 수 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을 주었다).
이런 걸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다음날 주류 사업자를 만났는데 “3.1절 기념 소주를 출시합니다. 이름은 독도 소주예요”란다. 세상에, 3.1절에 뭘 먹냐고 물었던 어제의 꼬마가 떠오르지 않을 리 없었다(그렇다고 그 아이에게 독도 소주를 선물하자는 것은 아니다).
3.1절은 알다시피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유관순누나가 투옥되고, 독립운동의 불이 붙고, 임시정부 탄생의 계기가 되고, 중국 5.4운동의동기가 되고, 타고르 시인에게 ‘동방의 불꽃’이란 영감을 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지식은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주류업자는 색다른 얘기를 했다.
우리에게 정부도 없고 군대도 없고 의회도 없는데 “대한독립만세”를 전국에서 외쳤다니,이상하지 않은가? 총 들고 싸우거나 우리 정부를 만들거나 해야 정상이지, 아무것도 없이 우리끼리 만세만세 외치며 독립을 선언한 것이 3.1 만세운동의 핵심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때도 이런 전무후무한 사태에 세계가 놀랐고,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도 놀라 자빠지며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을 위한 군사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즉, 정부니 군대니 외교니 강조할 것 없이, 우리는 스스로 이미 독립했다는 선언을 1919년 3월 1일 우리 선배들이 하면서,(그때 대부분의 잘난 이들은 종종 숨어 있었다) 세상의 기류를 바꾼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그런 시대가 계속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3.1절에도 뭔가를 먹으며 자기 독립을 선언하면 어떨까. 어쨌든 먹어야 힘이 나니까.
2021년 3월 1일자 더바이어 372호에 게재 됐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