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U다떨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수 Aug 26. 2022

돼지 고깃집 현수막 탄생기

남동생이 참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는 돼지 고깃집을 얼마 전 찾았다. 집에서 차로 5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그 식당은 경기도 광주 어딘가에 있었지만 서울 외곽의 갈빗집이 모여 있는 동네 이름을 딴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정작 도착했을 때는 한국과 독일, 미국,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까지, 세계 각지에서 먼 길을 돌아온 돼지고기들로 냉장고가 가득 차 있어 간판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런 외딴곳의 식당에서도 여러 나라의 고기를 접할 수 있다니 참으로 글로벌한 시대다웠다. 한 명당 20,000원이 안 되는 금액에 무한으로 고기를 구울 수 있으니 이런 고물가 시대에 참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고물가는 식사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는데, 삼겹살인 줄 알고 가져온 건 베이컨이었고(예전에는 삼겹살이 있었다고 동생이 말했다.) 마늘과 상추는 리필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두툼한 항정살은 씹는 맛이 있었고 매운 갈비는 적당히 매워서, 일반 갈비는 달아 만족스러웠다.

 

점심시간에 맞춰 식당에 갔지만 빈자리가 많았다. 내 맞은편 왼쪽에는 노부부가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공깃밥을 주문했는지, 다른 메뉴를 주문했는지는 기억은 희미하지만, 종업원 한 명이 그 테이블로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이렇게 (많이) 잘라내시면 안 돼요."

 

고기를 굽다 탄 부분만 잘라서 한쪽에 두었는데 종업원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고기를 많이 잘라내면 그만큼 더 가져가 먹는다고 생각한 듯했다. 사실 누구도 일부러 고기를 태우려고 하지 않고 설사 잘라낸다고 하더라도 그 양은 한주먹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밥을 먹고 있는 손님에게 저렇게 말하다니.


 

한국의 어떤 식당에서의 낯선 풍경은 아닐지라도 볼 때마다 참 쌀쌀맞다고 생각한다. 우리 테이블에도 잘라낸 탄 고기가 한쪽에 놓여 있었으니까 나는 괜히 마음이 움츠려졌다. 내 동생은 종업원이 자기한테도 와 뭐라고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었지만.

 

그제야 식당 벽면에 걸린 작은 현수막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 옮겨 보면 이렇다. '고기나 음식은 제발 조금씩 자주 가져다 드세요. 고기나 음식을.. 남기실시 환경 부담금 1인당 15,000원 얄짤없이 꼭 받습니다. 봐주는거 없읍니다. "주인백"' '환경 부담금' 15,000원의 5,000은 인쇄돼 있었지만 숫자 1은 매직펜으로 크게 쓰여 있었다.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그 문장들은 부탁이 아니라 사실 협박성(?) 멘트에 가까웠다. 어떻게 저런 마인드로 장사를 하느냐, 식당 하나를 운영해도 역시 전문가가 필요하다, '빕스'도 뷔페인데 저런 거 없지 않으냐 라며 나는 동생과 말을 나눴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저 현수막의 탄생 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이 가게 주인이 맞닥뜨렸을 과거를. 원래 저 자리에 현수막은 없었을 것이다. 고기를 가져가 먹지 않고 많이 남겨둔 테이블이 처음에는 한 개, 두 개…그리고 점점 늘어났을 것이다. 아까운 내 고기인데… 그게 다 돈인데… 그러면서 주인은 안타까움과 화가 밀려왔을 것이다. 왜 손님들은 적당히를 모르냐며. 강력한 멘트를 쓰면 손님들이 적당히 고기를 접시에 담을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저 현수막은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기를 남기고 간 손님들은 있었을 거고. 뭔가 조치는 취해야겠는데 현수막을 다시 만들기에는 돈이 드니까. 그래서 매직펜으로 5,000원 앞에 1을 써 15,000원이 되었을 것이다. 환경 부담금이 한 번에 세 배나 오르긴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럴듯한 상상이긴 하지만 현수막에 저런 글이 적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아래에서 나와 동생은,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은,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던 것이다. 종업원의 한마디와 현수막의 글을 보고 나니 왠지 이 식당의 숯에서 뿜어내는 뜨거움은 사라지고 긴장감과 황량함으로 가득 차 버린 것 같았다. 분명 어떤 몇몇 사건들로 촉발되었을 일련의 일들이 돌고 돌아 무겁게 공기를 짓누르는–손님들의 마음도-현수막의 문장이 되어버렸으니까. 이날 유독 빈 테이블이 많았던 건 우연이었을까. 현수막의 글을 읽은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쪽에 올려둔 탄 고기를 한 번 바라보고 또 숯에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괜히 15,000원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기에 냉면으로 내 배는 가득 찼다. 몸은 든든해지고 조금 나른해지기까지 했지만 마음은 조금 허전했다. '얄짤없이' 그렇게 정말, '봐주는 게 없음'했어야 했는지에 대한 쓸쓸함과 작은 의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거진의 이전글 팝콘과 컵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