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다큐멘터리 <성덕>이 돌풍을 일으켰다. 1999년생으로 22세의 영화과 학생이 처음 만든 다큐멘터리가 세 번의 상영에서 모두 매진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취소표를 간신히 구했다는 글이 SNS에 올라오기도 했다. 아이돌 가수의 '덕후'로 자신을 '성덕'(성공한 덕후)이라고 자처한 오세연(23·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감독 본인의 이야기에 젊은 관객들은 주목했다. 그를 지난 20일 만났다.
오 감독이 중학생 때 눈에 띄고 싶어 한복까지 입고 만나러 갈 정도로 열렬히 쫓아다녔던 가수 정준영은 성범죄를 일으켜 구속됐다. 그런 가수를 응원한 감독이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고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팬들을 만난 이야기에 관객들은 웃고 분노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첫 상영 때 관객들 틈 속에서 두려움과 긴장 속에 영화를 보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도중 "갑자기 긴장이 풀려 화장실에 너무 가고 싶었"다던 오 감독은 여러 영화제에서 매진이 됐다는 말에 턱에 손을 괴더니 눈을 반짝였다. "매진 안 된 영화제가 없었죠. 영화제마다 <성덕>이 처음으로 매진이 됐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고요. 하하하."
<성덕>은 작년 부산독립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당시 영화제는 ''사랑했던 시간을 정리하고 나아가기 위해 질문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라고 작품을 평가했다. 이후 1년여간 서울독립영화제, 마리끌레르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 등에서 꾸준히 인기를 모았고 오는 28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팬들에 대한 이야기가 매체에서 다뤄질 때는 납작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팬덤이라고 하면 극성팬들만 있다거나… '빠순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으로 쓰이니까요. 사실 누군가의 팬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팬들이 주인공이 되는, '실패한', '망한' 팬들이 주인공인 게 처음이어서 기대해 주신 것 같아요."
오 감독은 '그'의 팬이 된 처음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중1 때 우연히 TV를 틀었다 '그'의 무대를 봤다. "일반인인데도 카리스마와 무대를 휘어잡는 능력이 대단했다. 어떻게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렇게 덕질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그'의 굿즈를 팬들과 제작하고 모으고 '그'의 노래로 힘을 냈다. 그 덕분일까. 중학교 시절에는 전교 1등도 했다. 그러다 '그'의 팬이던 7년째 어느 날, 오 감독은 '그'의 성범죄 사실을 접한다. 추락한 스타의 모습에 실망하고 눈물까지 흘린다. 스타와 함께한 긴 추억의 시간은 감독의 말처럼 "개그 소재처럼 흑역사"가 됐다.
오 감독은 그 사건 이후에도 정준영을 좋아하는 가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떻게 아직도 좋아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 생겼다"는 오 감독은 "'덕질'이라는 건 어떤 걸까"라고 또 다른 궁금증을 떠올렸다. 캠코더를 들었다. 정준영 말고도 범죄자가 된 스타를 응원했던 20~30대 팬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렇게 2년간 촬영, 각본, 편집, 연출을 홀로 맡아 85분짜리 결과물을 내놓았다.
팬들은 스타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꺼내기도 하지만 사건을 일으킨 스타들의 성장에 자신들이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타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팬인 나조차도 죄책감을 가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터뷰이 중 한 명이 '죄 없는 죄책감'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계속 생각해 보게 됐어요."
그는 1년 동안 영화제를 돌면서 관객들에게 고해성사 같은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보통 GV(관객과의 만남)에 가면 '영화 너무 잘 봤다'라고 질문을 시작하는데 우리 영화에서는 '저도 ○○○팬이었는데요'라고 말하더라"라고 했다. 이어 "이제 감독님에 대한 팬도 생길 텐데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질문 주신 분도 있었다. 농담 삼아 저를 좋아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며 웃었다.
"이 다큐를 만들면서 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제 또래 여성들 혹은 20~30대, 누군가의 팬이었던 사람들이 한 번쯤 경험해봤을 일이기 때문에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꽤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관객분이 '우리 시절을 보상받게 해 줘서 고맙다'라고 해줬을 때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오 감독이 서울역에서 열린 '태극기 부대' 집회를 찾아가고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모습도 다큐멘터리에 있다. "남아있는 팬들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 (태극기 부대) 분들을 보면서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 팬덤과 연예 팬덤이 비슷하잖아요. 기분이 이상했어요. 예전에는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팬의 관점에서 보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이 어떤 사람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게 보였거든요."
다큐멘터리 제작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감정 이입을 위해 '그'의 노래를 들었다던 오 감독은 완성 이후 다시는 듣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은 덕질하는 게 특별히 없다고. "삶의 생기가 없어지고 있어요. 덕질을 하고 싶은데 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그들이 찾아오는 거니까요.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많은 연락 바랍니다. 하하하."
오 감독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한때 열광했던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이날 가장 고심하는 표정을 짓던 오 감독이 말했다.
"죗값을 잘 치르고 돌아오셔라."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먼저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