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다 피해자는 아니겠지만, 남자들은 사회적인 흐름이 있어서 성폭행·성희롱을 조심해야겠다는 의식이 생겼을 거고요. 약자 위치에 있는 분들은 절차를 통해 상담할 수 있다는 걸아니까 안정감이 왔을 거예요."
임순례(59) 영화감독은 연말에도 쉴 새 없이 바빴다. 그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대표이자 인천 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 가지 직함이 추가됐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공동센터장.
'든든'은 영화계 성폭력을 근절하고 성평등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여성영화인모임과 영화진흥위원회와 합쳐 마련된 단체다. 지난해 3월 1일 개소했다.
임 감독은 2017년 마케팅사와 영화제 등을 돌아다니면서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 조사를 했다.
2018년 2월부터 영화산업 내 성희롱·성폭력 상담 및 신고 접수를 받았다. 10개월 간 총 31건이 접수됐고 대면상담과 무료법률기관 등을 통해 22건을 처리했다. 또 영화산업 내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2기 강사 7명을 위촉했다. 영화제와 영화단체, 학교 등을 방문해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11월 기준으로 90차례 진행했다. 영화계에 표준 계약서에 (가해자가) 성희롱·성폭력을 저지른 게 확인되면 (가해자를) 즉각 해고할 수 있다는 규정을 포함했다.
'2017년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46.1%(여성61.5%·남성 17.2%)가 '성폭력·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여성영화인모임과 영화진흥위원회가 2017년 7월 11일부터 9월 13일까지 영화인 총 749명(여성 467명·남성 267명·부불분명 1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한 결과다.
"영화계 산업적으로 여성인력들이 공정하게 기회를 못 잡는 경우도 있어요. '성평등 센터' 든든이기 때문에 여성 영화인들이 정책적으로 배려 받을 수 있는 부분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한국영화 산업 내에서 남녀가 균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더 큰 비전입니다."
지난해 여성 감독 연출 상업영화 4편 불과… "돋보인 것 아냐"
든든에 따르면, 지난해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 성인영화 등을 제외하고 개봉한 한국영화는 상업·다양성 영화를 합쳐 188편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지난해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22편이었다. 일부에서는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평가했지만 임 감독은 선을 그었다. 상업 영화는 임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 방수인 감독의 '덕구', 이언희 감독의 '탐정:리턴즈', 이지원 감독의 '미쓰백' 등 4편에 불과했다.
1994년 '우중산책'으로 단편 데뷔한 임 감독은 이후 20년 간 17편의 장·단편을 연출 및 제작했다. 그는 여성 영화인이 더 많이 배출돼야 한다고 했다.
"저를 뛰어넘는 작품 수나 영향력에서 여성 감독들이 나와야 하는데 20년 넘게 배출이 안됐어요. (여성 영화인들에게) 열악한 환경인거죠. 한국 영화가 너무 양극화되고 장르화, 대형화 되면서 여성들에게 장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영화에 큰 예산이 투입되다 보니, 손익분기점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장르 영화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 속에서 여성이 영화 속에서 피해자로 소개되거나 주변인으로 구색 맞추기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 감독은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에 대해 일부 관객들이 거부하는 행동에 주목한다. 관객의 의식이 먼저 변하면 자연스럽게 남성색이 강한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나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거다.
"리틀 포레스트 손익분기점 돌파? 김태리, 류준열 덕분"
이 같은 영화계의 '기울어진 극장' 속에 지난해 임 감독이 연출한 '리틀 포레스트'는 150만 6269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손익분기점(80만 명)을 돌파했다. 김태리를 원톱으로 내세우고 순제작비 15억 원에 불과한 작은 영화지만 화제를 낳았다.
임 감독은 처음에는 적은 예산으로 손익분기점을 내야한다는 부담감에 영화 제작을 망설였다. 또 리듬이 느리게 전개되는 일본 원작의 작품을 한국식으로 각색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일본 영화인 '리틀 포레스트' 시리즈가 일본에서 소규모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등 흥행이 되지 않은 점도 임 감독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임 감독이 리메이크를 결심한 이유는 폭력적이었던 한국영화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였다. 2016년은 한국 영화시장에 남성들이 대거 나오고 폭력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많았다. 흥행티켓을 가진 남성배우들의 출연이 겹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관객들이 (폭력적인) 한국 영화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요구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관객의 입장에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들을 보고나면 괴로웠어요. 그런 풍조에 반기를 들고 싶었어요. 작은 예산으로 평온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생순' 이후 대중에게 다가가려 노력
임 감독이 자신의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한 영화는 2004년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아테네 올림픽 감동 실화를 다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년)이다. 당시 4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여성 감독으로서도 최고의 흥행작을 썼다. 이는 그 동안 예술 영화에 치중했던 임 감독이 상업영화로 대중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준 계기가 됐다.
"10만 명이 보는 영화를 만들 것이냐, 아니면 대중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리듬으로 영화를 만들 것이냐의 고민은 있었어요. '우생순' 이후 관객 취향에 맞춘 작품들이 강해졌습니다. 영화에 투자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대중에게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임 감독이 영화에 우리사회의 '루저'를 주로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가 어렸을 때 인천의 가난한 변두리 동네에서 살았어요. 어려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삶의 주변부나 절대적 빈곤 같은 쪽이 친숙했어요. 남들이 볼 때는 비루할 것만 같지만 그 안에는 인생의 진실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루저라고 규정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