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감독의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감독이 온라인 롤플레잉게임 일랜시아 유저들에게 "왜 일랜시아를 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호우주의보
"일랜시아를 왜 하세요?"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박윤진(28) 감독은 온라인게임 '일랜시아' 유저들을 만나면서 이 질문을 던졌다. 약 2년간의 촬영 끝에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완성했다. 일랜시아는 넥슨이 1999년 7월 출시한 온라인 RPG(롤플레잉게임)이다. 올해로 21년째가 된 장수게임이다.
박 감독은 역시 일랜시아의 오래된 유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게임을 시작해 올해로 18년째. 그의 질문은 게임에 대한 애정과 애증에서 시작됐다. 도대체 이 게임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박 감독은 유저들까지 만나면서 질문을 던졌을까. 오는 12월 3일 개봉을 앞둔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매진될 정도로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는 새로운 시각과 패기를 담은 신인감독에게 주는 젊은 기러기상을 받았다.
-혹시 오늘도 일랜시아를 하고 오셨나요?
"일랜시아는 원래는 일어나자마자 켜요.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씻고 오느라고 하지 못했어요."
-거의 매일 하나요?
"거의 매일 해요. PC카톡도 컴퓨터를 켜면 바로 저절로 켜지잖아요. 저에게는 그런 느낌이거든요. 메신저 같은? 일랜시아를 켜놓고 창을 내려놓아요. 메신저 같은 거라서 의식하고 들어가지는 않은 것 같아요."
-본인이 길드마스터라서 그런 건 아닌가요?
"제가 길마라서 그런 것도 있겠죠. 저는 자주 일랜시아에 들어와서 (길드원이) 주로 누가 활동하는지 봐요. 누가 채팅을 많이 하는지 길드원을 챙겨주는지 지켜볼 수 있으니까요. (그 중에서) 매 달 세 명 정도 우수회원을 선정해요. 길드 활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한테 주는 자격 같은 거예요. 제 길드원은 지금 40~45명 정도 돼요."
-11살 때 남동생의 추천으로 일랜시아를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점 때문에 이 게임에 매료가 되었나요? 단지 재미 때문인가요? 아니면 (캐릭터로) 모험을 한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요?
"초등학생 때는 많은 경험을 할 수는 없잖아요.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니는 나이도 아니었고. 집, 학교, 학원. 이렇게 살다가 게임을 했는데 너무 신세계인 거예요. 그 나이 때에. 왜냐하면 이(일랜시아) 안에서 친구도 사귈 수 있고, 거래를 할 수도 있고 어떤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이득을 챙길 수도 있고요. 내가 현실에서 그 나이 때 경험하지 못하는 너무 많은 것들은 게임 안에서 하면서 너무 재미있는 거죠.
일랜시아 안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캐릭터를 스스로 키울 수 있잖아요. 캐릭터를 내가 세팅하는 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11살이면 제가 뭔가 꿈을 이루려면 20년이 있어야 하니까. 여기서는 한두 달 게임하면 직업을 달 수 있잖아요. 제가 지금 29살인데 그때 느꼈던 감정들? 새로운 걸 발견하면서 재미있었던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그 감정들이 그립지 않나. 자꾸 돌아가는 것 같아요. 일랜시아로."
일랜시아는 출시 당시에는 인기를 끌었지만 2008년부터 개발진과 운영진이 손을 놓은 게 문제였다. 업데이트가 되지 않자 게임 시스템은 허술해졌다. 대표적인 게 매크로. 게임 속 캐릭터가 단순 노동을 자동으로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여기저기 생겼다. 해킹과 버그도 계속됐다. 유저들은 게임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다큐멘터리 안에서 한 유저는 게임에 대해 "강점 없어요." "이런 쓰레기 같은 게임이 없어 진짜"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들 이런 상황에도 게임을 계속한다. 중앙대 영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 감독은 이 지점에 대해 생각했고 졸업 작품 소재로 일랜시아를 선택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이유가 일랜시아를 하는 사람이 궁금해서예요. 다큐멘터리를 보니 일랜시아를 "쓰레기 같은 게임"이라고도 하는데요. 왜 궁금했나요?.
"제가 이 다큐를 찍기 전부터 항상 궁금한 거였어요. 다른 화려하고 재미있는 게임이 훨씬 많은데 왜 우리는 이 게임을 하고 있을까. 제가 제일 궁금했던 걸 찍은 거예요. (애정과 애증은) 둘 다 있는데 애증이 더 많죠.(웃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만났던 분들은 몇 명이에요? 인터뷰 첫 반응도 궁금해요.
"15명 정도 만났어요. 길드원인 친구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어요. 목포, 일산, 의정부에 갔었고 다른 친구들은 수도권 안에 있어서 찾아갔어요. 두 명 정도는 처음 본 분들이었어요. (나머지는) 항상 밥 먹을 때도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술자리에서도 많이 이야기해서 크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어요."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게임이 이야기이면서 게임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동시대 2030세대 청년들의 자화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박 감독이 만난 일랜시아 한 유저는 "초등학교 때 8개씩 학원을 다녔다"며 일랜시아를 "내가 시간을 쏟을수록 절대적인 결과가 나오는 게임"이라고 말한다. 박 감독의 남동생은 "매일 수치로 바로바로 결과가 보이니까 성취감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각자 게임 이야기를 하면서 각자 자신의 인생을 풀어놓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일랜시아를 언제부터 했는지 말해달라고 했어요. 또 어떤 캐릭터를 키우고 있을 때 현실에서는 뭐 하고 있는지 물어봤어요. 일랜시아에서 그때그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다들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던가요?
"그렇죠. 어렸을 때 (게임 안에서) 사기를 당했을 때는 슬펐지만 다들 힘들 때 조금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힘들 때 다들 일랜시아로 돌아오는 공통점이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삶에서 힘들 때 여기로 돌아왔는가? 깊게 질문을 확장했던 것 같아요."
-저도 유저들의 대답에서 공통점이 좀 보였어요. 다들 실제로 삶에서 노력은 하는데 되지 않는 상황 같은 것들이요.
"맞아요. 전반적으로 보인 공통점이 현실에서는 이렇게 노력했는데 안 되고. 좌절하는 순간에 일랜시아 안에서 매크로를 돌리면서 내 캐릭터를 손쉽고 빠르게 키우는 것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도 '노력'과 묶어서 말씀하실 게 있을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노력한 만큼 얻어질 때도 있고 안 얻어질 때도 있잖아요. 그때마다 저도 일랜시아로 와서 집착 수준으로 매크로를 돌렸던 것 같아요. 최근 5년 사이에서 제일 열심히 (게임을) 했을 때가 제일 바쁠 때였거든요. 바쁜데 그 와중에 집에 와서 일랜시아를 하는 거죠. 오늘 하루 너무 바쁘게 보냈는데 뭔가 얻는 게 없는 것 같고 잘하는지 혼란스러울 때 일랜시아 안에서 매크로를 열심히 돌렸어요."
-왜 바쁘셨나요?
"서울예술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중앙대에 편입했어요. 학교에서 영화도 찍어야 하고 성적도 챙겨야 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어요. 알바를 하면 돈이 많아져야 하고 공부를 하면 성적이 좋아져야 하고 영화를 찍으면 영화가 잘되어야 하는데 세 개 다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와서 매크로 세팅하고 돌렸던 것 같아요."
-일랜시아를 PC카톡처럼 켠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게임이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느껴졌고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는 이유가 "내가 여기 있다"는 생존을 알리는 느낌도 있었어요.
"일랜시아를 예전에 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좋게 기억하고 있거든요. 일랜시아를 하면서 행복했고 그게 나만의 기억이면 그냥 '내가 옛날에 이랬어'라고 일기처럼 되는데 그 안(게임)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나만의 경험이 아닌 게 되는 거잖아요. 내 옛날 경험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내가 예전에 행복했던 시절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우리가 같이 옛날 감정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럼 반대로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인가요?
"행복의 기준이 내가 앞으로 뭘할지 상상하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초등학생 때보다는 줄지 않았나 생각하거든요. 그런 부분에서는 불행인 것 같아요. 다른 부분에서는 더 행복한 부분도 있겠지만."
영화는 2018년 2월 촬영을 시작해 2019년 12월에 완성됐다.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넥슨 관계자들이 영화제를 찾아와 영화를 봤다. 상영 이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올해 6월 12년 만에 게임 이벤트가 열렸다. 넥슨 관계자들은 박 감독을 찾아왔다. 7월에는 일랜시아 운영진과 유저들간의 간담회가 열렸다. 이런 과정을 모두 다큐멘터리에 담으면서 처음에 40분짜리였던 단편은 86분짜리 장편으로 확장됐다.
-이벤트나 유저간담회는 예상하지 못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100% 기쁘지는 않았어요. 뭔가 해야 될 일들이 많아질 느낌이었고요. 예전에는 벽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면 이젠 문을 조금 열어줘서 거길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처음엔 당연히 기뻤죠. 그런데 이벤트 이후에 관리가 조금 더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벤트를 열어준 거 감사해요. 아마 (이벤트를 열어준) 직원 분은 이 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잘 모를) 젊은 분이 했을 텐데 이벤트를 열어주신 거잖아요.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큐멘터리가 세상에 영향을 낀다는 믿음도 있었을 텐데 실제로 변화를 이끌었어요. 세상까진 아니지만 넥슨이라는 기업을 움직였어요.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새로 보셨을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를 보면 내가 사는 세상을 보게 되는 느낌이 있어요.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 찍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변화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다른 일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감을 얻었어요."
-다큐멘터리가 게임이 주제라서 그런지 유쾌한 느낌이 있는데요. 감독님의 성향이 그런 게 있는 걸까요?
"지인들 사이에서 웃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항상 B급 감성을 좋아하고요. 저는 그런(B급 감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걸 만들어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B급 감성 안에 애정을 좋아해요."
-일랜시아 온라인카페에서 개인적으로 이벤트도 여시던데요. 게임을 정말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저들이 좋아해 주고 이 유저들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저는. 우리가 같이 예전의 경험을 공유했으면 좋겠으니까. 열고 또 열고. 어떻게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아요."
-만약에 일랜시아와 이별한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요?
"일단 종료가 안 되면 좋겠죠? 요즘 일랜시아를 보면 아무래도 방치가 되다 보니까 안 좋은 오류들이 더 생기고 유저들이 찾아내고 있어요. 사실 언제 종료가 돼도 이상하지 않은 게임인 건 맞거든요. (종료가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