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turekang May 22. 2020

음악이 다르게 들릴 때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는데 ‘그대 고운 내 사랑’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물이 확 나면서 가슴이 따듯해졌다. 평이한 멜로디에 담긴 가사가 상당히 묵직했다.      


“그대 짊어진 삶의 무게 가늠하지 못해 오늘도 나는 이렇게 외로워하지만, 

가시나무 숲 서걱이던 내 가슴 치우고 그대를 쉬게 하고 싶어 내 귀한 사람아.”     


원곡은 99년 이정열 씨가 불렀고, 어반 자카파가 리메이크한 버전이 있어 들어봤는데, 드라마에서 산모의 남편이 분만 때 부르는 노래가 이정열씨나 어반자카파의 음반보다 훨씬 더 좋았다. 심지어 무반주였는데. 노래하신 배우 분의 목소리가 좋기도 했지만, 아이의 탄생에 벅찬 아빠가 분만실에서 의료진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와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설정에서 가사의 의미가 마음으로 확 들어왔다. OST가 이래서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음악이 서사를 풍성하게 꾸며주는 것 같지만, 반대로 서사가 음악의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음악이 장소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기 마련이다. 늘 소리에 둘러싸여 사는 나는 되려 음악을 깊이 듣지 못한다. 앙상블을 맞추고 소리의 질을 높이고, 정교하게 가다듬는 차원에서는 초집중을 하면서 듣지만, 음악의 의미, 음악의 메시지, 그 음악이 다른 이의 마음에 던지는 감동의 측면에서는 냉랭하고 무감각할 때가 많다. 아이가 입원 중이던 병실에서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한 대학에서 공개레슨 요청을 받은 터라 악보를 꼼꼼히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6인실 커튼 너머로 느닷없이 옆 침대의 환자 다리가 넘어왔다. 순간 기겁을 하고 커튼 너머 옆 침대로 갔는데, 환자는 제주도에서 온 열 여덟 살 청소년이었다. 불과 몇 주 만에 멀쩡하던 아들이 사지를 못 쓰게 되고 호흡곤란까지 온 상황에 그 어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뇌종양을 너무 늦게 발견했고, 아이는 손쓰기 어려운 시점에 병원에 온 듯 했다. 팔다리를 제어하지 못하는 아들의 다리를 거두면서 어머니께서는 연신 사과를 하셨고, 환자 상태의 위중함에 놀란 나는 황급히 내 아이의 침대로 돌아와서 다시 이어폰을 꼽았다.


얼핏 들으면 어둡고 우울한 감성의 낭만적인 음악 같지만, 사실 첼로 소나타 1번은 매우 논리 정연한 작품이다. 3악장의 모티브를 바흐의 <푸가의 기법>에서 그대로 가져왔고, 1악장의 주제선율 역시 동일한 모티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연관성을 한두 번 들어서는 알 수 없지만, 악보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낸 그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브람스는 두 개의 첼로 소나타를 남겼다. 1번은 서른에, 2번은 쉰 중반에 썼다. 1번을 쓰던 1862년 여름에 그는 고향인 함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에 지원했으나, 친한 동료이자 선배인 바리톤 율리우스 슈톡하우젠에게 밀려 고배를 마신다. 슈톡하우젠은 당대 최고의 바리톤 가수였고, 브람스보다 몇 해 연장자이기도 했지만, 당시 클라라 슈만처럼 두 인물을 모두 잘 아는 음악계 인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 자리에 브람스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브람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던 듯하다. 함부르크 출신의 촉망받는 작곡가이자, 빼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자존심의 상처가 꽤 컸던지, 이후 함부르크를 떠나 아예 비엔나로 이주해버린다. 


피바디 재학 시절, 첼리스트 교수님의 작은 연주를 반주하게 되면서 이 곡을 처음 만났다. 베개로 써도 손색없을 만큼 두꺼운 스와포드의 브람스 평전도 그 학기에 읽었고, 학생으로서 교수의 음악회 반주에 선발되었다는 뿌듯함에 열과 성을 다했었다. 좋은 첼리스트와의 값진 연주 기회였지만, 작품에 순수하게 빠져들기에는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내 안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자신을 떨어트린 함부르크 오케스트라를 향해 보란 듯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젊고 자신만만한 브람스를 떠올렸었다. 성경과도 같이 거룩한 바흐의 유작, <푸가의 기법>을 가져다가 복잡한 대위법을 사용해 새롭게 완성시킨 그의 시도가 용감무쌍해 보였다. 너희들이 알아보지 못한 내가 누구인지 똑바로 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죽음에 근접한 18살 아이의 헐떡이는 호흡과 낮게 흐느끼는 부모의 울음을 커튼 너머로 감지하면서 듣는 브람스 첼로 소나타는 이전에 내가 만난 적이 없는 소리였다. 그 때 그 음악을 들으며 어떤 구체적인 생각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마치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생생하다. 너무나 익숙한 음악인데 삶과 죽음의 접점에서 첼로의 선율이 꿈틀대며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음악은 늘 덧없고, 헛되며, 연약한 것인데, 삶이 너무나 연약하고 헛되고 덧없어 보일 때 음악은 오히려 구체적이고 힘이 있었다. 제주 청년은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병실에서 새롭게 만난 브람스 소나타의 이야기를 공개레슨에서 공유하지 못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