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욕심에 대한 생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오랜만에 팀원들과 점심을 함께 했다. 난 도시락을 싸다닌다. 도시락을 싸다니는 이유는 세 가지다. 코로나로 인한 걱정, 쏠쏠한 밥값, 그리고 중식을 너무 좋아하는 팀원들. 중식을 좋아 하지만 1주일에 4번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식당은 자율배식 시스템을 갖춘 곳이었다. 따뜻한 밥과 매일 제공되는 물김치는 기본. 엄마 손맛이 느껴지는 다섯종류의 밑반찬과 메인 반찬. 손만큼 정이 많아 보이는 이모들 그리고 6천 원이라는 저렴한 밥값. 팀원들은 혜자식당이라고 입을 모아 자랑했다. 얼마 전 500원이 올라 아쉽다는 말은 충격을 더했다.
팀원들의 말에 따르면 매일 비슷한 수준의 차림이 나온다니 혜자식당 인정이다. 이날 메인 메뉴는 두 가지었다. 갓 튀긴 노릇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징어튀김 그리고 특유의 윤기가 좔좔 흐르는 돼지불고기.
'도대체 이렇게 팔면 남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의 메뉴들이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밥과 반찬을 식판에 담았다. 오랜만의 따뜻한 만찬을 즐길 준비를 했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막내 팀원의 식판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의 식판은 다른 이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김치면 시금치며 밑반찬을 담을 자리엔 오징어튀김이 거만하게 누워 있었고, 된장국은 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돼지불고기가 고봉밥과 쌍벽을 이루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된장국은 식판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너무 욕심 낸 거 아니야? 괜찮겠어?"
저 많은 걸 다 먹는 게 가능할까 싶어 넌지시 물어봤다. 10분 남짓 시간이 흘렀다. 녀석은 식판을 내밀며 한마디 했다.
"저 욕심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마치 승전보를 알리듯 의기양양한 녀석. 녀석의 말대로 욕심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나보다 더 깨끗이.
"그래 네 말이 맞네. 욕심을 깨끗이 비웠네."라며 웃으며 화답을 했다. 준비된 구수한 숭늉을 한잔 들고 사무실로 발거음을 옮겼다. 머릿속에서 기존의 생각이 업데이트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동안 욕심은 '과한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기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욕심은 필연적으로 기준이 존재한다. 기준을 넘어서는 순간 욕심이란 이름이 붙는다. 막내 팀원이 식판으로 보여주었듯이 내 기준에서 많다고 욕심은 아니었다. 난 그동안 많은 부분을 내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상시 '욕심이 많네'라는 생각을 할 때면 대체로 나의 상식이라는 잣대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나이에 맞지 않는 고가의 자동차나 넓고 비싼 아파트, 통 큰 투자등을 보며 욕심이라고 판단했던 것처럼. 그들의 환경과 노력 그리고 꿈을 보지 않았다. 중소형신차보다 저렴한 중고차일 수도 있다.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파트일 수도 있다. 지독한 학습 이후의 투자일 수도 있다. 막연히 내가 욕심이란 이름표를 붙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욕심은 양이 아닌 소화의 영역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팀원의 식판처럼 자신이 소화를 할 수 있다면 욕심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짜장면 보통만으로 배가 부른 내가 곱빼기를 먹으면 욕심이다. 늘 속이 불편하고 소화가 안되니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라는 옛 속담처럼 난 짜장면 보통이 딱! 인 것이다.
욕심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안빈낙도의 삶이 꼭 현명한 것은 아니다. 욕심은 삶을 피폐하게 하지만 노력을 이끌어 내고 삶을 활기차게도 한다. 안빈낙도는 삶에 평안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현실을 외면하게도 한다. 누군가는 송충이이고 누군가는 뱁새고 누군가는 황새고 누군가는 베짱이고 누군가는 개미다. 각자의 역량과 환경은 다르다. 송충이가 아닌 개미가 솔잎을 먹으면 욕심이다. 욕심은 타인의 기준이 아니다. 욕심의 전적으로 자신의 기준인 것이다.
살펴봐야겠다. 내가 생각한 욕심이 누군가의 기준으로 정의된 욕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어쩌면 내가 송충이가 아닐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