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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비소리 Feb 27. 2023

이름 모를 그녀에게...

고맙고 감사합니다.

휴일 이른 아침. 나만의 힐링 포인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1년 전 우연히 경험하게 된 스터디카페라는 공간. 그 옛날 독서실과는 다른 정갈함과 열정 가득함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내가 즐겨 찾는 시간 스터디카페는 높은 확률로 아무도 없다. 번화가 길거리도 조용하고 카페안도 정적이 흐른다. 가족모두가 단잠을 자는 시간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니 마음 또한 편하다. 


차가운 공기가 전날 술자리로 인해 깨지 않은 머리를 깨운다. 습관적으로 뒤적뒤적 주머니를 뒤진다. 늘 한쪽 주머니를 차지하던 익숙한 물건이 잡히지 않았다.

담배.


전날 입었던 코트에 담배를 넣어두고 깜빡하고 그냥 나왔다. 편의점 문을 열고 점원에게 말을 건넨다.

"에쎄 체인지 0.5mg 한 갑주세요~"

그녀가 날 바라본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듯 나에게 말을 건네어온다.

"죄송하데 신분증 좀 보여 줄 수 있을까요?"


검은색 모자를 한껏 눌러쓰고 얼큰이 마스크로 코 중간부터 턱까지 얼굴을 2/3를 감춰진 나의 모습. 게다가 얼마 전 구매한 학생들이 즐겨 입는 하얀색 점퍼. 등에 걸쳐진 커다란 백팩. 그리고 새벽 근무로 인한 그녀의 피로. 투철한 직업의식. 이 모든 것이 맞물려 그녀는 작은 착각을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거의 반백면을 살아온 나한테 요구할 말은 분명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백팩에 있는 지갑에서 운전 면허증을 꺼내 그녀의 손에 전달하고 나서야 나의 요구 사항은 받아들여졌다. 


누군가에는 익숙하고 별거 아닌 이 경험이 나에게는 특별한 경험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분증 제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그녀의 요구는 과대망상을 불러일으켰다. 동안임을 인증(?) 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대화나 경험을 회상해 본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 머리에 무스(요즘도 무스라고 하나?)를 바르고 한껏 멋을 낸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하게 되면 친구들은 신분증 제시를 받았지만 난 단 한 번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지 못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친구들을 위한 코미디언이 되는 날이었다. 가끔 내가 신분증 제시를 받는지 못 받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아~어쩌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친구들이 문제 었을 수도 있겠다. 그 친구들이 동안일 수도 있지 않나!...(괜한 위로를 했다.)

 

물론 코미디언만 되는 건 아니었다. 영웅이 되는 날도 있었다. 자격이 없던 시절 가끔 어른들만의 음료를 사러 갈 때. 비디오 가게에서 어른들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테이프를 빌려올 때면 친구들은 날 우러러봤다. 그럴 때면 모든 선택권은 나에게 있었다. 그동안의 밀린 코미디 코미디관람료와 쌓인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낼 기회였다. 무튼! 친구들이 웃고 떠들 때면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한마디 던지곤 했다.


"짜쌰~너희가 몰라서 그래 나 같은 얼굴이 나이 들어도 변화가 없어!" 


한때 싫어하는 연예인이 몇 명 있었다. 이승환 씨나 최수종 씨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연예인들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제나이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같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어렸을 때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20년+ α 의 시간이 지나서야 듣게 되다니. 비록 여러 페이크의 결과일지라도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애써 참았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주머니 속에 넣은 담배를 만진 작 거렸다. 미소가 지어졌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말도 있구나.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기쁨을 글로 남겨야지. 등등등 별의별 생각이 들어서였다.


평소보다 더 가볍고 즐거운 발걸음이었다. 힐링 포인트에 도착도 하기 전 힐링이 되었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이 있다. 우연으로 인한 뜻밖의 기쁨이나 발견을 의미한다. 그녀의 짧은 말은 나에게 일종의 세렌디피티 었다. 잊고 있던 오래전 추억을 만나고 작은 행복감을 발견하게 된 세렌디피티.


이런 기쁨을 준 이름 모를 그녀에게 그때 차마 하지 못한 말을 건네고 싶다.


"감사하고 고마워요. 저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주셔서..."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면 이 말을 꼭! 들려줘야겠다. 


"봐~내가 그랬지! 나 같은 얼굴이 나이 들어도 변화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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