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봄 강좌 -1. 3월 12일
2004년 가을에 이어 이듬해 봄 표영삼 선생을 모시고 동학 공부모임을 다시 진행했다. 이때는 매주 화요일 세 차례(3월 15일, 22일, 29일) 강의를 하고 주말인 3월 26일(토)~27일 이틀 동안은 유적지 답사를 진행했다. 다행히 당시 모심과살림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두었던 기록을 캡처해둔 노트를 만나게 돼 기록을 복원할 수 있었다.
강의 초록과 함께, 표영삼 선생이 소개한 [신인간] 실린 표영삼 선생의 저작인 관련 자료도 당시 홈페이지에 함께 소개하였던 것이므로 첨부하였다.
2004년 가을 강의에서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구도의 길, 신비체험과 신 관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동학에 대해 잘못 알려진 내용과 편견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2004년 가을 네 차례 진행된 표영삼 선생의 강의에서는 동학의 초창기, 창도 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보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어서 진행하는 2005년 봄 강의는 철저한 실천가였던 동학 2대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동학이 어떻게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직적으로 제도화되어 갔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시대정신'을 짚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다.
3월 15일 첫 강의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탄생과 유년 시절 그리고 결혼 전의 생활과 되어 화전민 생활에 대한 이야기, 해월 선생이 스스로 용담을 찾아가 대신사(수운 선생)로부터 도를 받은 것과 종교체험 ('천어'를 듣는)을 위해 진행한 고행 과정을 통해 ‘천어'의 이치를 깨닫는 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표영삼 선생은 해월 선생의 탄생부터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시면서 해월 선생이 피신 생활 도중 잡혀가 처형되기까지의 과정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긴긴 겨울밤 화롯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편안한 강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옛날이야기들은 3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표영삼 선생이 희미한 사료와 구전 자료를 좇아 직접 발로 찾아가 답사하며 고증하고 증명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다. 해월 선생이 피신 다니는 동안 겪은 일화들과 함께 그분의 성품과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배경 설명들까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수강생들은 모두 이야기에 한껏 빠져들었다.
무려 36년간이나 피신해 다니던 해월 선생이 1898년 4월 5일 원주 송골에 있는 제자 원덕여의 집에서 관군에게 체포가 되어 서울로 압송 돼 1898년 6월 2일 교수형이 처해진 뒤 대강 시신을 수습한 이야기를 먼저 하신 뒤 다시 해월 선생의 탄생부터 유년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독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뛰어났던 젊은 시절의 해월, 19세에 장가를 들어 처가살이하던 해월, 처가살이를 끝내고 화전민 생활을 하던 해월, 그리고 스스로 대신사(수운)를 찾아가 도를 받는 과정.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비체험 '천어'를 듣기 위해 정성을 다해 고행을 겪고 결국 천어를 들은 후 마침내 그 이치를 깨닫고 실천적으로 재해석하는 해월.
여기까지 해월 선생을 따라가다 보면 책 속에 문자로 기록된 해월 선생이 아닌 생생한 인간적인 면모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천어'의 이치를 깨닫는 과정에서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구도자 이전의 성실한 인간적인 면모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표영삼 선생은 종교체험(신비체험)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가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에 대해 말씀하셨다. '천어'를 들고 난 후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을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니 '수운 선생이 크게 기뻐하셨다'라고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포장을 하고 사는 존재다. 포장을 제거해 놓고 보면 우주적 생명체와 일치한다. 다 털어내고 원점, 생명의 입장으로 돌아가 문제를 보면 저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똑같다. 고행이라는 것은 종교체험에서 쓸데없는 것이다. 다 털어내놓고 보면 똑같을 수밖에 없다. 자꾸만 자신을 털어내는 것이다. 정신적인 수양이란 '털어내는 것'이다. 털어낸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온 우주 생명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월이 자신이 들은 천어의 이치를 이렇게 결론 냈고, 수운 생각도 이와 같았다는 것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처형당한 뒤 피신을 다녀야 했던 해월 최시형 선생. 그는 동학교주 2세였다. 어느 종교나 단체나 2세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2세가 지녀야 할 덕목, 그리고 행동과 의식에 대해 강조하셨다. 해월 선생은 철저한 실천을 기반으로 동학을 제도화하고 조직을 다져나갔다. 그 일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수운 선생이 죽고 난 후 그 제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려 모이고 그 모임을 정례화시키는 것이 동학이 제도화되는 출발이었다. 즉, 제사를 지낸 후 해월 선생이 가장 먼저 한 설교 내용을 보면 '인(人)이 내천(乃天)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귀천(貴賤)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인내천이라는 말은 양반 상놈의 차별을 없애자라는 것이다. 인내천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4월 15일 수운 선생이 돌아가신 날 제사를 지내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적자 서자를 폐지하자는 말씀도 했다.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얘기는 내 몸에 한울님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 몸을 잘 모셔야 한다" 수운 선생이 여기까지 말씀하셨다면 해월 선생은 "사람 안에 한울이 있으니 얼마나 사람 몸이 존귀한 것이냐? 그러니 모든 사람은 다 존귀하다. 그러니 양반 상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철폐해야 한다." 수운 선생의 시천주를 재해석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해월 선생이 얼마나 실천적이었느냐는 점이다.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끌고 와 제도화하려 한 것이다.
조상의 생명도 내 몸과 내 마음속에 구체적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제사를 지낼 때도 '항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를 벽이 아니라 나를 향하게 상을 돌려놓으라 말씀하신 것이다. 해월 선생은 처음부터 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교인들의 의식 수준이 따라와 주지 않았기에 20년을 기다린 뒤 1897년에 되어서야 이 말씀을 하셨다. 제사라는 것 자체를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아예 지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 당시 민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표영삼 선생의 설명이었다.
입도 전의 해월 신사 (표영삼 / [신인간] 통권 642호, 통권 643호)
신사 해월 최시형(神師 海月 崔時亨)은 1827년(丁亥) 3월 21일(양 4월 16일)에 외가(月城 裵氏)인 경주 동촌 황오리 (현재 황오동 229번지)에서 태어났다. 최남주(羅南柱, 1906 생)가 갖고 있는 족보에 의하면 아버지는 최종수(崔宗秀, 1804. 6. 22 ~ 1841. 10. 15) 요 어머니는 월성(月城) 배 씨(裵氏,? ~ 1832. 4. 22)이다. 6세 때 모친상을 당한 (5세에 모친상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1년 후 영일(迎日) 정 씨(鄭氏)를 계모로 맞아 섬겼다. 신사의 명은 경상(慶翔)이요 자는 경오(敬悟)이다. 포덕 16년(乙亥,1875) 10월 18일에 지도자들을 불러 제례를 지내고 나서 시형(時亨)으로 이름을 고쳤다. 호는 해월(海月)이라 하였으나 『최선생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대선생주문집 (大先生主文集)』, 그리고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어디에도 언제부터 해월이란 호를 사용했는지 기록이 없다. 포덕 30년(1889) 경부터 접주 또는 육임(六任職) 첩지(帖紙)를 발행하면서 해월장(海月章)을 처음 사용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해월이라는 호는 이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신사도 대신사와 같이 암호(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 신사가 자라난 곳은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기일동(基日, 터일)이었다. 19세에 손 씨 부인과 결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족보에 선친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했으므로 윗대부터 살아왔던 모양이다. 해 월신 사는 부친이 살아 있을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초급 한문을 수학하였다. (천도교) 교중에는 해월신사를 무식한 어른으로 잘못 전하고 있다.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해월신사를 무식한 어른으로 묘사했다. 즉 "해월 선생은 마음속에 무한한 도덕이 있는 것이지만 문자에 식견이 없고 또는 제도와 의식에 구구한 생각이 없고.....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 하여 한참 동안은 춘풍 선생님이라고 하는 비평을 들어온 일도 있었다"라고 하였다. 오지영뿐만 아니라 천도교서』에도 “본래 문식이 무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즉 경전을 수찬 할 때 “문식이 무하 여" 구송(口誦) 한 것을 문식이 있는 이가 받아쓰게 했다고 하였다. 신사는 여러 형식의 한시를 남기고 있다. 문식이 없었다면 어떻게 많은 한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포덕 13년에 정선 갈래사 적조암에서 기도를 마치고 지은 한시는 너무도 유명하다
태백산공사십구(太白山工四十九)
수아봉팔각주정(受我鳳八各主定)
천의봉상개화천(天宜峰上開花天)
금일탁마오현금(今日琢磨五絃琴)
적멸궁전탈진세(寂滅宮殿脫塵世)
선종기도칠칠기(善終祈禱七七期)
이 시는 문식이 뛰어난 사람도 지을 수 없는 한시라고 할 수 있다.
포덕 31년에는 금산 복호동에서 내수도문과 내칙을 반포하였다. 경어로 간절히 호소한 이 글은 신사가 처음으로 한글로 지은 글이다. 이 글에는 한문 수준이 높지 않으면 구사할 수 없는 낱말들이 들어 있다. 신사는 15세까지 분명히 한문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을 유념하면 문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신사의 가족관계
해월신사의 부친 종수(宋秀) 어른은 38세 (1841년) 되던 10월에 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교중 기록에는 12세에 부친상을 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최남주가 소장한 족보에는 신축년( 年)인 15세 때에 부친이 별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유족은 신사와 계모, 누이동생 등 셋이었으나 부친상을 마치자 뿔뿔이 흩어졌다. 계모 정 씨는 어디로 떠나버렸고 누이동생은 먼 일가로 가서 의탁하였다. 누이동생은 후일 임익서(林益瑞)와 결혼하였다. 해신사의 손자인 검암 최익환(崔益煥)은 “의암성사께서 임익서를 서울로 데려다 생활하게 한 적이 있었다 했으며 후손들은 김제군(金提郡) 초처면(草處面, 현재는 鳳南面) 용신리(龍新里)에 살고 있다"라고 하였다. 홀로 남은 해월 신사도 곧 먼 친척집으로 가서 의탁하게 되었다.
오상준의『본교역사』에, 부친이 돌아가신 후 신사는 “입에 풀칠할 형편이 못되어(糊口之策), 동에서 심부름해주고 서쪽에서 품을 팔았고, 아침에 절구로 찧어 저녁에 거두는 식으로 살았으며, 몸에는 온전한 의복을 입지 못하시어 (完衣未着), 입(口)에는 술 찌꺼기나 겨도 마다할 형편이 못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생활을 해월신사는 뼈에 사무치도록 간직하였다. 훗날 가족들에게 타이르기를 도인이 오면 밥을 드셨는가 묻지 말고 밥상부터 차려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옷을 지을 때엔 반드시 새 천으로 안감을 쓰라"라고 당부하였다 한다. 낡은 천을 안감으로 만든 옷을 불편하게 입었던 과거를 생각하여 이렇게 타일렀었다. 그리고 하인을 부를 때 '머슴애, 머슴애'라고 부르지 말고 꼭 이름을 부르라고 하였다 한다. “배고픔이나, 추위나, 힘든 일은 참아낼 수 있었으나 머슴애라는 빈정대는 말은 죽기보다 싫었다”라고 했다.
결혼 이전의 신사
『시천교역사』에는 신사가 10세 때에 30민의 엽전을 지고 70리 길을 거뜬히 갔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선천적으로 건강했음을 알 수 있다. 친척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해월 신사는 17세가 되자 제지소(製紙所, 한지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신사가 살고 있는 터일(基日洞) 안쪽에는 오금당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닥나무가 잘 자라 오래전부터 집집마다. 닥나무를 심어 종이 (한지)를 생산했다. 마을 계곡 밑을 흐르는 시냇물은 물이 풍부하여 한지 생산에 적격이었다. 10평 남짓한 종이방들이 이 개울가에 있었다. 동리 사람들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여기서 한지를 만들었다. 늦가을이 되면 닥나무를 거두어들여 제지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떠돌이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종이방에는 늘 불을 지피므로 엄동설한에도 이불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을 해주고 한겨울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신사도 늦가을부터 이곳에 들어가 숙식하면서 일을 배웠다. 붙임성이 좋고 부지런하여 남보다. 빨리 배웠다. 18세에는 한몫을 하는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때때로 흥해나 청하, 포항, 경주, 영덕 등지의 거래처에 한지를 날라다 주고 대금도 받아오는 일을 하였다. 생계가 안정되자 신사의 신수는 어느덧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19세 되던 어느 날 흥해에 사는 오 씨라는 어린 과부가 청혼하여 왔다. 오상준의 『본교역사』에는 “오 씨라는 여인이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마침 (且) 가산 이 약간(頗) 넉넉(贍足) 하였다. 하루는 신사를 만나 혼인하자고 하였다. 신사는 남의 재산을 넘보는 것 같이 꺼림칙하여 거절하였다(絶不許) 한다. 이 해(乙巳 1845년) 가을에 먼 일가의 중매로 홍해 매곡에 사는 밀양 손 씨(孫氏, ?~1889.10.11)와 부부의 의를 맺었다. 이후 처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림을 차린 것 같다.
검곡서 화전민 생활
28세(甲寅 1854년)에 이르러 신광면 마북동(馬北洞)으로 이사하였다. 매곡에서 북쪽으로 약 40리 떨어진 곳이며 고향인 터일 바로 옆 동리인 산중마을이다. 교중 기록에는 이곳으로 이사오자 마을 사람들이 집강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천도교서』에는 "방인(坊人)이 해월신사의 공렴유위(公廉有威)하심을 견하고 중망으로 특천하여 일방(一坊) 풍강(風綱, 執綱)의 임을 위(委)하였다"고 하였다. 집강은 지금의 이장(里長)격으로 가끔 관에서 알리는 일을 동민에게 전해주는 일을 했다. 지면이 넓어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고 마을에는 최 씨 일가도 많이 살아 신사를 추천한 것 같다. 마북동은 땅이 토박하여 소출이 넉넉지 못했다. 식구가 늘어나자 33세 (己未,1859년) 되던 봄에 골짜기 안쪽 금 등골(琴登谷)로 들어갔다.「해월 선생 문집」에는 검동곡(劍洞谷)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권병덕의 수기에도 금동골로 들어갔다 하였다. 그런데 오상준의 「본교역사」에서 잘못되기 시작하였다. 검동곡(劍洞谷)이라 기록해야 하는데 중간에 있는 동(洞)자를 밑에 붙여 검곡동(劍谷洞)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로부터 각종 교중 기록에는 검곡동(劍谷洞)으로 잘못 전해지게 되었다.
필자는 포덕 119년(1978년) 5월 17일에 처음 찾아갔다. 마북동을 답사하기 위해서 찾아갔다가 검곡의 소재도 알게 되었다. 교중 기록에는 신사가 28세 때에 승광면(昇光面) 마복동 (馬伏東)으로 이사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인근 지역에는 승광면 마복동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우연히 흥해 지역을 찾다가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마북동(馬北洞)을 발견하게 되었다.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과 유사하여 현지에 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먼저 흥해로 가서 버스로 신광면 소재지인 토성동에 이르렀다. 여기서 알아보니 북쪽으로 8km 거리에 마북동이 있다고 한다.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은 잘못된 기록이다. 가르쳐준 대로 청하로 가는 길을 따라 입석동(立石洞)에 이르러 다리를 건넜다. 청하로 넘어가는 길과 반곡 저수지가 있는 반곡동(盤谷洞)으로 가는 길이 갈라졌다. 왼쪽으로 올라가 반곡동 마을 한가운데 길을 지나 솔밭에 이르렀다. 작은 개울을 건너자 다시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왼쪽은 해월신사가 자랐던 터일로 들어가는 길이고 바른쪽은 마북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바른 쪽으로 언덕길을 오르자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왼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1km 정도 들어가자 마북동이 나왔다. 초등학교 분교가 나오고 바른쪽 언덕 위로 길게 들어선 집들은 약 10호 정도가 있었다. 마을회관과 같은 집이 보여 찾아가니 마침 뜰에 있던 81 세 되는 강철회(姜徹會, 1898년생) 어른을 만났다.
그는 동학의 주문을 알고 있었으며 신사에 관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월 신사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하였다. 필자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해주었다. 옛날 이곳은 경주 관내였다고 하며 동리 이름은 마북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검곡은 이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오 3시경에 검곡을 찾아 들어갔다. 당벌등(堂伐嶝, 지금은 당수동)을 지나 인편(仁片)으로 가는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얼마 안 가서 왼편에 깊은 골짜기가 하나 나타났다. 지금은 입구에 저수지 둑이 있어 찾기 쉬우며 여기서 왼쪽으로 1km 정도 골짜기 안쪽으로 가면 검곡이 나온다. 골짜기 끝자락에 이르니 왼쪽 언덕 위에 감나무가 보였다. 가파른 기슭으로 10m 정도 오르자 2백 년이 넘어 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옆으로 70평 정도의 계단식 집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집터는 네 채 정도였으나 신사께서 살았던 곳은 알 길이 없다. 노송이 서 있는 곳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훤하다. 집터 위쪽으로 5백 평 정도의 밭이 있었고 골짜기 일대에는 여기저기 화전(火田) 터가 널려 있었다. 집터 북쪽 골짜기에도 잘 정리된 5백 평이 넘어 보이는 계단식 밭터가 보였다. 인근에 샘물이 있어야 한다. 집 뒤 왼편 능선 기슭으로 올라가니 말라버린 우물 자국이 있었다. 여름철에는 물이 나왔는지 모르나 겨울이 되면 말라버린 것 같았다. 집터 뒤 바른편으로 10m 정도 올라가자 계곡으로 내려가는 ㄹ자 형 길이 나 있었다. 20m 정도의 골짜기 밑에는 수량이 풍부한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기슭에는 오막살이 집터도 하나 보였다. 아마도 이 개울물을 식수나 생활용 수로 사용한 것 같다.
용담 찾아가 입도
동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땅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았다고 한다. 신사는 33세(己未 1859년)되던 봄에 식구를 거느리고 이 금등골(劍谷)로 들어와 화전민 생활을 하였다. 몸은 고단했으나 소출도 늘어났고 마음도 평안했다. 35세가 되 던 1961년 6월 초였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경주 용담에 신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곧 용담으로 찾아가 대신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마디마디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으며 사람을 감동시켰다. 신사는 이상하게도 대 신사를 보자마자 첫눈에 끌렸다.
대신사는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고 입도식을 올렸다고 여겨진다. 신사의 재판기록에는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丙寅年, 1866)에 간성(杆城) 사는 필묵상(筆墨商) 박춘서(朴春瑞)라는 사람에게 소위 동학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박춘서는 간성 사람이 아니라 영덕 사람이며 입도한 연대도 맞지 않는다. 양양 도인을 지도하러 갈 때 신사와 동행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신사가 그에게 도를 정해주었다. 신사가 처음 포덕한 사람이 바로 박춘서였을 것이다. 신사는 1861년 6월 어느 날 스스로 용담을 찾아가 대신 사로부터 도를 받았다.
신사 해월 최경상은 35세(포덕 2년, 1861년) 되던 6월 어느 날 경주 용담으로 찾아가 대신사로부터 도를 받았다. 이후 한 달에 두세 번씩 용담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해 8월 중순경에도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용담으로 찾아갔다. 많은 도인들이 모여 있었으며 이 자리에서 주고받는 화제는 천어(天語)였다. 모두 착실히 수행하여 천어를 들었다고 자랑이다. 천어를 못 들은 이는 신사뿐이었다.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자 저녁을 먹고 나서 대신사에게 집으로 간다는 인사를 올렸다. 밤중에 70리 길을 가겠다고 나서자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신사는 이날 밤 검등골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부터 수련에 들어갔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멍석을 드리우고 수련하기도 하였고, 얼음을 깨고 찬물에 들어가 목욕하는 고행도 해보았다. 6개월이 지난 이듬해 1월 중순경에 드디어 천어를 듣게 되었다. “ 찬물에 급히 들어앉으면 건강에 해로우니라."는 천어였다. 신사는 이 종교체험을 대신사께 아뢰자 「수덕문」의 한 구절이라고 하였다. 천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씀을 들은 신사는 천어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한다. 이후 신사는 천어 실천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천어에 관한 종교체험을 살펴보기로 한다.
전해지는 기록들
『해월선생문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8월 10일경에 이기(理氣, 여기서는 천어의 이치를 말함)를 투명하게 얻어보려는 마음이 있어 가산을 돌보지 않은 채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온종일 매일 밤을 이어가며 주문 읽기에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 지 3~4개월이 지났다. 앞서 듣기에 사람들이 독공하여 매번 천어를 들었다 하는데 지금 나는 하나의 기미(動靜)도 없으니 이는 곧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때는 추위가 심한 겨울이었다. 인적이 고요한 깊은 밤에 문전에 있는 못으로 나가서 얼음을 깨고 매일 밤 수 차례씩 목욕하기를 2개월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피부를 도려 내는 듯했으나 나중에는 얼음물도 따스한 것 같았다. 선생은 본래부터 가난한 형편이라 나무를 해 오는 사람이 따로 없었으며, 떨어진 창문과 벌어진 벽 사이로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너진 부엌과 방앗간 얼음 위에서 머리를 빗 으며 또 열흘을 지냈다. 공중에서 간곡하게 타이르는 말이 들려왔다. 이르기를 '건강한 몸에 해로운 것은 곧 찬물에 감 자기 들어가 앉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권병덕(權秉悳)은 천도교회 월보」(제270호, 1934년 6월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즉 “많은 도우들이... 한울님 말씀을 매양 듣는다 하거늘 해월 신사 스스로 생각하되... 나는 그렇지 못하니 정성이 부족함이라.... 대신사께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대신사 가라사되 '날이 다 저물었거늘 어찌 70리를 가리오' 하시며 만류하시었으나 신사 기어이 절하고 물러가니 .... . 해월 신사 금등골 본집으로 돌아와서 문 앞 대숲아래 못에 가서 얼음을 깨고 목욕을 하실 새.... 매야(每夜)에 두 시간씩 목욕하며" 라 하였다. 권병덕은 대신사를 직접 모셨던 이관영(李觀)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고 기록하였다 한다. 그는 1890년대에 상주로 와서 살았을 때 이 말을 권병덕에게 전해 주었다.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사는 집으로 돌아오자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기를 두 달이 되어도 천어가 들려오지 않자 그 뒤부터는 문에 멍석을 드리우고 주문을 읽었다 한다. 환히 비치는 빛마저 방해가 되는 것 같아 문에 멍석을 드리워 캄캄하게 만들고 주문을 읽었다 한다. 이렇게 하기를 또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천어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단식을 해보기로 했다. 제대로 잠자고 제대로 먹고 주문을 읽는 것은 정성 들이는 자세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20여 일 간 음식을 끊고 수련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몸만 수척해졌을 뿐 천어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어느덧 11월이 되었다. 여전히 천어는 들려오지 않았다. 수행방법을 다시 바꾸어보았다. 이번에는 계곡으로 내려가 개울을 막고 아침저녁으로 냉수 목욕을 하는 고행에 들어갔다. 한 달 후인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공중에서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강한 몸에 해로운 것은 또한 찬물에 갑자기 들어앉는 것이니라"는 소리였다. 신사는 이 소리를 듣자 천어라고 믿고 곧 물에서 나와 냉수 목욕을 중단하였다.「천도 교서』에는 “목욕할 차로 얼음물에 들어가니 어디서 말소리가 들리되 '양신소해우한천지급좌 (陽身所害又寒泉之急坐)'라 완연히 들리거늘 신사 그제야 한울님 명교를 받으시고 얼음물에 목욕함을 그치었다"고 하였다. 이후 방 안에서 수련하였는데 다시 한 기적이 생겼다. "여러 달 동안 계속해서 밤새도록 등잔불을 켜 두어도 기름 반 종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시 21일이 지나 밤이 되어도 조금도 줄지 않았다. 이때 영덕에 사는 이겸(李仲)이 한 종지 기름을 가져오자 그날 밤 등잔불에 이 기름을 붓고 켜 보니 기름은 어느덧 말라버렸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두 가지 종교체험을 한 셈이다. 하나는 천어를 듣는 체험이었고 하나는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이었다.
천어의 재해석
신사는 여러 면에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 당시 대신사는 남원에 가 있었으므로 주변에는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7월이 되자 대신사가 돌아와 경주 서면 도리 박대여의 집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신사는 찾아가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하였다. 냉수 목욕을 하다 들은 천어 이야기와 오랫동안 등잔 기름이 마르지 않았던 이야기를 아뢰었다. “대선 생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천리의 자연이다. 그대는 큰 조화를 받은 것이니 마음으로 기뻐하고 자부하라" 하였다고 『해월선생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냉수 목욕할 때 공중에서 들려온 "양신소해우한천지급좌"는 내가 (대신사) 남원에서 수덕문」을 초잡아 읊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사는 천어가 아니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천어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되었다. 한다. 그동안 "양신소해우한천지급좌" 는 틀림없는 천어로 믿어왔다. 그런데 이 “양신소해우한천지급좌"는 대신사가 수덕문을 초잡아 읊은 것과 같다고 하자 실망하는 빛이 없지 않았다.「해원 신사법설」중에도 천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천어가 어찌 따로 있으리오. ... 강화(降話)는 사람의 사욕과 감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오, 공리와 천심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킴이니, 말이 이에 합하고 도에 통한다하면 어느 것이 천어 아님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해월 선생문집」이나 해월신사법설, 그리고 『천도교서』의 기록들은 대신사의 진의를 얼마나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의문이 없지 않다. 기록을 남긴 필자 의 주관이 가미된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대신사의 높고 깊은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듣는 이의 아는 정도만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대신사나 신사의 말씀을 기록한 이들이 제대로 이해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신사는 이미 대신사의 뜻 을 깊이 이해하는 중견 도인 중의 한 분이었다. 그래서 대신사가 수덕문을 초하여 그 중 하나의 글귀를 읽었다는 말을 들자 천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 천어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과 바른 기운 으로 성실하게 행한 뒤에 내려진 판단을 언어로 표출한 것이다." 라고 해석한 것이다. 결국 신사가 들은 “양신소해 우한천지급좌"는 천어가 아니면서 천어였던 것이다. 신사는 천어를 듣기 위해 5개월 이나 성실하고 또 성실하게 수련하였다. 창문에 멍석을 드리우고 주문을 읽어보기도 하고 단식을 하며 주문을 읽기도 하였다. 끝내는 자신의 게으름을 채찍질하며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냉수목욕이라는 고행 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며 천어를 듣기 위한 성실성을 보였다. 그런데 천어는 들려오지 않았다. 양심에 비추어 꺼릴 것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수련하였으나 여전히 천어는 들려오지 않았다. 1월 어느날, 이날도 여느 때처럼 얼음을 깨고 찬물에 들 어갔다. 발을 담그는 순간 “오늘도 헛수고만 하고 몸만 해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스쳐갔다. 이 순간 공중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물에 갑자기 들어앉으면 건강에 해로우니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천어를 듣게 되었다. 이 천어는 양심에 비추어 부끄럼 없이 성실을 다한 후의 해답이었다.
신사는 이 전어의 내용에 대해 의아스러운 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천어라면 오묘한 진리를 깨우쳐 주는 내용이어야 하는데 신사가 들은 천어는 냉수 목욕을 중지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대신 사에게 물어보기에 이르렀고 대신사는 찬물에 갑자기 들어앉으면 건강에 해로우니라"는 글귀는 수덕문을 초잡아 읽은 구절과 같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천어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신사는 오랫동안 천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론은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과 바른 기운으로 성실하게 행한 뒤에 내려진 판단을 언어로 표출한 것이 천어이다"라고 재해석한 것이다.
천어의 실천적 재해석
신사가 천어를 재해석한 핵심은 오묘하게만 여겼던 천어를 일상적인 생활 속의 천어로 끌어냈다는 데 있다. 신사는 대신사가 가르친 대로 "내 몸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하였으므로 이 한울님의 덕과 합일하고 이 한울님의 참뜻(心)과 하나가 된 경지에서 하는 말은 모두 천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전의 천어를 이루는 바탕을 보면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양분한 토대 위에 놓여져 있었다. 저 높은 세상을 초감성적인 세계라 하여 신성한 세계로 보았고 최고가치체계가 존재하는 세계로 보았다. 이에 반해 이 지상의 현실 세계는 감성적인 세계로서 초감성계로부터 수직적으로 지배받는 세계요 속된 세계로 보았다. 따라서 천어는 언제나 저 높은 곳에서 즉 초감성계에서 내려지는 말씀으로 보게 된 것 이다.
그런데 신사의 천어에 관한 재해석은 우선 감성계니 초감성계니 하는 이중 세계 자체를 부정하고 접근한 것이다. 즉 저세상이 따로 있고 이 세상이 따로 있다는 관념을 부정한다. 살아가는 이 세계는 이중 세계가 아니라 유일하고 단일한 세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천어는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대신사는 이것을 내유강화지교(內有降話之敎)라 하였다. 대신사의 내유강화 지교에는 가치전도가 깔려 있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가치체계들이 순간에 무너지고 새로운 생각하는 틀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을 가치전도라고 한다. 그 첫째 조건이 이중 세계의 부정이며 저 높은 초감성계에 있던 최고 가치체계를 우리 몸 안으로 끌어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과제상황에 대한 해답은 가공의 초강성계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나로부터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신사는 천어를 여러 형태로 말씀하였다. 그 중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면 실천적인 재해석을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 (吾)는 비록 부녀 소아의 언(言)이라도 또한 가히 학(學)할 것은 학하며 사(師)할 것은 사하노니 시(是) 선(善)은 일체 천주의 어(語)이므로 써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余) 수도의 시에 천어를 누문하였으니 금에 사(思)컨대 시(是) 아직 미달간(未達間)의 초보에 재한 사(事)이다. 약(若) 대각자로서 천어 인어의 구별을 문하면 시(是) 강(江)과 해(海)의 구별을 작(作)하는 자와 무이하도다. 인시천 (人是天)이어나 인어(人語) 어찌 천어 아니랴."고 하였다.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양신소해 무한천 지급좌"라는 천어를 경험한 신사는 이를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실천적으로 재해석 하였다. 신사의 위대성은 바로 대신사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재해석한 데 있다. 초감성게로부터 내려진다는 천어의 관념에 대해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과 바른 기운으로 성실하게 행한 뒤에 내려진 판단을 언어로 표현할 때 이것이 바로 천어라"는 해석은 신사가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재해석은 대신사의 가르침을 충분히 소화해 내지 못하면 이루어질 수 없다. 대신사의 신념체계를 종합적으로 소화한 후에 이루어진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사는 대신사가 가르친 시천주 신 관념에 대해 여러 면에서 재해석하였다. 시천주의 신 관념에 대해 실천적으로 첫째 가는 해석은 인내천이었다. 다음으로는 사인여천이었다. 모든 사람은 한울을 모시고 있으므로 한울님처럼 존엄하게 보지는 것이 인내천이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존엄하다면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것이 사인여천이다. 이 실천적인 해석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도 그 폭이 하도넓어 저절로 감탄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