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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Jul 17. 2021

삼각산, 서울의 산

나이 들면서 추억하는 일이 많아졌다. 버스 차창으로 흘러드는 가로수 그늘이나  무심히 스쳐가는 행인들의 얼굴에서,  비 그친 뒤 쏟아지는 햇살이나 계절이 바뀔 때 변하는 바람의 느낌 같은 것에서 느닷없이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초식동물처럼  느릿느릿 되씹는 일.      

 ‘맑은 개울을 거슬러 오르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 동산을 오를 때... ’      

퇴근길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라디오를 통해  ‘정릉 배밭골 들려올 때도 그랬다. 실감 나지 않지만  벌써 30 년이나 흘렀다. 돈암동에 시내버스 종점이 있던 시절.  미아리 고개를 넘으면 드문드문 펼쳐지던 논과 , 언덕마다 위태롭게 들어선 초라한 집들. 유년시절, 아버지가 거울을 걸쳐놓고 면도를 하던 창틀 너머로 우뚝하던 인수봉.

새로 뚫린 북악 스카이웨이는 가난한 부부들이 택시를 대절해  바퀴 도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할 만큼 짙은 녹음 속의 낭만적인 길이었지만  곳곳을 막아서는 총을  군인들과 통제구역 안으로 언뜻 보이는 벙커들이 위압감을 주기도 했다. 돈암동에서 스카이웨이를 넘어 정릉까지 아버지의  새벽 산책에 자주 따라다녔다. 지금은 빼곡하게 들어찬 다가구주택에 파묻혀  정취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신흥사  언덕에 오르면 희붐한 새벽하늘 너머로  인수봉과 백운대가 솟아 있었다.

생활의 책임이 유예된 유년의 기억들이라 그런 것일까. 1960,70년대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고 우리 이웃들은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지만 지금보다 정이 넘치는 시절이었지 싶다. 곤궁한 살림이었지만  너머로 김장김치를 담은 바가지나 수제비, 국수 그릇이 넘나들었다. 새벽이면 주전자를 들고 약수터로 물을 길으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암동 신흥사  언덕에서 일출을 맞은 일이 았다. 안암동 개운사 뒷산으로 떠오른 해가 북한산 자락에 금빛 햇살을 뿌려놓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훼손되지 않은 어떤 삶의 원형처럼 기억하고 있다.  

농촌이 해체되기 시작한  무렵, 고향에서 뿌리 뽑힌 삶들이 ‘대처에 가면 어떻게든 살겠지하는 위태로운 신념에 기댄   상경해서는 북한산과 마주했을 것이다. 객지의 삶은 팍팍했겠지만 고단한 퇴근길에 노을 비낀 북한산을 멀리 바라보는 일이나, 빌딩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범상치 않은 광경은 큰 위로가 되었겠지.

충무로에 있는 회사에 다닐  점심시간이면 필동 한옥마을을 통해 남산에 올라가곤 했다. 노동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임노동자의 삶이 그렇듯이, 생각과 다른 글을 써야  때나 수긍할  없는 간섭을 받아 상심했을  그나마 걸어 올라갈  있는 산 가까이 있다는  작지 않은 위안이었다. 점심시간 내내 남산길에서 멀리 북한산을 마주한  숨이 가빠  만큼 부지런히 걷다 보면 이마와 등에 땀이 배이고 땀방울 위로 바람이 스쳐가며 뿌려지는 청량감이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곤 했다. 게다가 필동에서 창덕궁까지  뻗어있는 돈화문로 너머로 말갛게 개어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있는 인수봉과 백운대에 눈길이 닿으면 코끝이 찡해지곤 했다. 북한산은 이렇기 갖은 애환에 뒤섞여 복닥거리고 있는 ‘서울의  것이다.   떠났다가 서울로 돌아올  중부고속도로 하남 부근 언덕을 올라서면  띠처럼 펼쳐진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수유리에서 우이동으로 좌회전하는 버스 전면에 펼치지는 광경과 일산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들어올  한쪽 창에 가득 펼쳐지는 산줄기.           

백 년 전의 한국 기행에서 버드 비숍은  시내에서 심심찮게 호랑이 사냥이 벌어지고 있는 서울 시내, 명동성당이 거의 완공되어가던 그 무렵 서울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입산이 금지된 서울의 산들은 산등성이 사이사이에 검은 바위 투성이나 뒤틀린 소나무의 황폐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자줏빛 황혼이 지는 저녁이면 모든 산봉우리들이 마치 반투명의 핑크빛 자수정처럼 빛난다. 산그늘에는 코발트색이 깃들고 하늘은 초록색 안개가 베일처럼 언덕을 감싸는 이른 봄이면 경치는 너무나 황홀하다. 언덕바지에는 진달래가 불꽃의 화엽(花葉)처럼, 터뜨려진 체리열매처럼 피어나고, 막 꽃봉오리가 열리려는 벚꽃의 전율을 예기치 않은 골목에서 만나기도 한다. ’     


강북에 있는 많은 학교들의 교가에는 저마다 삼각산 혹은 북한산의 정기를 이어받거나 모아서 학교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서울을 떠나 몇 년 살아본 뒤에야 북한산이 비범하고 대단한 산이라는 것을 차츰 깨달았고 ‘북한산 정기’가 어떤 식으로든 내 몸 안에 작용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되었다. 가장 낮은 수준으로 정리해보자면 북한산이 화강암의 산이고 그 희고 단단한 석질이 주는 어떤 신뢰감이 인수봉을 올려다보는 서울 대부분 동네 사람들의 정서에 어떤 작용을 했으리라는 믿음.  1억 8천만 년 전부터 1억 3천만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에 지표 아래 8-10Km까지 솟구친 마그마가 천천히 식어서 만들어진 암석이라고 한다. 한강 너머의 금북정맥 (차령산맥, 광주산맥)의 산들은 조산 운동으로 땅 거죽이 밀려 올라간 것인데 비해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은 이때 지표 가까이(?) 진출한 마그마가 땅 속에서 굳어지며 화강암 되었고 1억 년 동안 융기와 침식을 통해 오늘의 모습으로 빚어졌다고 한다. 서울 강북의 기반은 거의 다 그때 조성된 화강암이라는데, 땅 속 10Km라는 말도 그렇고, 1억 년이라는 말도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아무리 길게 잡아도 3~400만 년이라고 하고 역사의 기록은 기껏 1만 년을 넘지 못하고 있음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절에는 부아악(負兒岳)이니 화산(華山)이니 하는 명칭이 문헌에 남아있다지만 현재까지는 삼각산이나 북한산으로 불리고, 1989년에 ‘북한산 국립공원’이 지정된 후로는 대부분 북한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삼각산은 흔히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세 암봉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믿지만 이와는 달리 부족장이 사는 곳을 뜻하는 셔블(서불, 서울)의 한자를 빈 발음 표기인 서(三), 불(뿔 角)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어쩐지 이 말을 믿고 싶어 진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삼각산은 곧 서울의 산이라는 말이다. 지금 북한산이 서울의 산이고 2천만 수도권 주민의 레저 대상지 이상의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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