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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Jan 07. 2022

표영삼 동학강의 6

2005년 봄 강좌-2

2005년 3월 22일 강의 


태백산에 들어


강원도 정선군 남면 고한이라는 외진 곳에 갈래사 적조암이라는 절이 있는데 해월 선생이 그곳으로 피신하여 49일간 기도를 한 적이 있다. 때는 한 겨울로 12월 즈음인데 그곳에서 시 한수를 남기셨다.


천의봉상 개화천(天宜峰上開花天)

금일탁마 오현금( 今日琢磨五鉉琴)


표영삼 선생은 도통 그 뜻을 해석하기가 어려워 직접 추운 겨울 그곳을 찾아가셨다고 한다. 시를 지은 그 상황을 직접 맞 대하면서 해석을 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른 아침, 근처 여관에서 잠을 자고 나와 초행길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찾아가며 그 시를 계속 읊조리며 보니 선생 나름의 해석이 되더라 하셨다.


"천의봉은 봉우리 이름인데 실제로는 그곳에는 천의봉이 없어요. 그렇다면 해월 선생이 직접 그렇게 이름을 지은 거라. 봉우리 위에 개화천이라. 온 하늘에 눈꽃이 활짝 폈다는 건데 한 겨울에 눈이 나뭇가지마다 내려 앉아 눈꽃을 피웠 는데 그곳은 이상하게도 눈꽃이 구슬 모양으로 얼어 맺혀요. 그날이 어찌나 추운지 습기가 지나가다가 나뭇가지마다. 구슬 모양의 얼음을 만든 겁니다. 그게 햇별을 받으면 기가 막힌 장관인데, 아하! 해월 선생도 이날처럼 습기가 차서 눈꽃이 얼음 꽃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렇게 노래했겠구나 싶었어요. 

금일탁마. 이게 구슬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 오현금은 뭔가. 구슬을 갈고 닦아 오현금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단 말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 가만히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바람소리가 들려요. 그냥 바람소리가 아니고 차가운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면서 맑은 소리가 나요. 그렇구나. 해원 선생이 아침에 이 광경을 보고 노래했구나 싶었지요."


물론 그 해석은 현실적인 정황에 대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의미, 즉 기도를 올리다가 깨달음을 열고 나서 지은 시일 수도 있다고 하셨지만, 어쩐지 표영삼 선생이 직접 그 추운 겨울 날 그 광경을 체험하신 그 해석이 더 다가오는 것 같다. 해월 선생에 대해 어떤 이들은 학식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시 지은 해월 선생을 어떻게 무식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씀을 하시며 해월 선생이 당시 쫓기는 긴박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그처럼 운치 있는 시를 남기신 일을 소개해 주셨다.

병인양요 후에 해월 선생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종교에 사람이 모인다. 종교도

사제적 기능, 위안적 기능, 예언자적 기능, 화해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한다. 이 중 예언적 기능, 앞으로 좋아진다는 암시를 통해 희망을 주고, 지금의 어려움을 신이 도와주고 있다는 위안적 기능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6.25 후 고향을 떠난 피난민과 60년대 후 농촌이 피폐해지면서 이농한 사람들. 전쟁을 겪었고, 항상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종교에 사람들이 집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교조신원운동

그런데, 이 시기에 1870년 10월 이필제가 등장한다. 이필제는 자기 말로는 수운 선생에게 입도했다고 하는데 그랬을 수도 있다. 그는 직업 혁명가다. 아니, 혁명가라기보다는 직업 반란 주모자라고 할 수 있다. 어려서 무과에 급제했고 해월 선생보다 두 살 위고 키가 크고 잘 생기고 말 소리도 왕왕거려 사람을 위압하는 위인인데, 전국을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고 한다. 이필제는 진주에서 민란을 기도하다 실패한다. 역사에 기록된 그 진주민란은 아니라 이필제의 거사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에서 작당하다 탄로나 도주한 작은 민요(民擾)다. 생각하기에 동학교도들은 대개 가족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쫓겨난 사람들이라 불평 불만이 많을 테니 이 사람들에게 교조신원을 명분으로 걸고 영해부(府)를 덮치자고 부추겼다. 즉, 수운 선생이 억울하게 돌아갔으니 신원을 해주고 자유롭게 동학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를 한 것이다. 동학도인들 중 그러한 명분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모두 해야지 하는데 200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자 해월 선생을 설득하려 사람을 보낸다. 2월 초까지 사람을 5번을 보냈지만 해월 선생이 움직이지 않았다. 


해월 선생은 시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교도들이 계속해서 해야 된다고 주장을 하니까 할 수 없이 이필제를 만난 것이다. 고성 지역, 낙동강변 현풍이라는 곳이 있는데 대여섯 군데에서 교도들이 몰려들었다. 교조신원운동을 한다니까 멀리서 양식까지 들고 와서 나라에 청을 하면 자유롭게 동학을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수천 명이 왔다는 기록도 있고 관에서 조사한 기록에는 200명이라고도 하는데, 5~600명 즈음이 맞는 것 같다. 전날 밤, 다들 모여서 소를 두 마리 잡고 술도 얼큰히 했다. 밤 9시 내지 9시 반 즈음, 그 시절엔 잠을 일찍 잔 모양이다. 안에서 내통한 사람으로 부터 모두 자니까 안심하고 들어오라는 기별이 오고, 영해 부 안에 원래 포수가 20여명 쯤 있었는데 그날은 다 가고 세 명만 남아 있었다.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면서 들어가 부사를 처형 한다. 그런데 죄목이 시원찮았다. 나헌 수록이라는 데 보면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다. 그 부사가 평소 인심을 잃은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부사 생일잔치에 오라고 해서 가면 떡국을 끓여주고는 한 그릇에 수십 냥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부사를 앉혀 놓고 관인을 내놔라 하니까 못 내놓겠다하니 찔러 죽였다. 그걸 내놓으면 나라에서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보면 교조신원 운동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 명분을 내세워 도인들을 동원 했는데 결과는 아니더라는 것이 다. 무력으로 쳐들어가 부사를 죽이고 쌀과 식량을 탈취한 과정에서 교조신원운동의 성격을 찾기는 힘들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역사학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해석해야 한다. 앞으로 계속 자료가 나오는데, 역사학자 들이 잘못 해석하면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 사건은 성격 규정이 참 어렵다. 그 사건으로 100여 명은 목이 잘리고 인근에 살던 200여 명은 집을 떠나 떠돌이 신세가 되고 동학을 재건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도 수운 선생이 죽을 당시만 해도 재건할 여건이 되었는데 이 이후에는 동학하면 사람이 죽어 나가니까 아무도 동학을 안 하려고 한다. 해월 선생은 그 이후 목숨을 부지하려고 인 쪽으로 갔다가 강원도 산간지역으로 가게 된 것이다. 아직 동학이라는 것이 그곳까지 내려가지 않았을 때였다.


다시 일어서다 

동학도인들이 고향에서 쫓겨나 그래도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원평이나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보은 장내리 등 동학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찾아갔다.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저 꼴 된다. 대책을 세우자 해서 1892년 5월 7월에 요새 말로 데모를 해서 동학을 합법적으로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해월 선생은 이때도 시기가 안 좋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해월 선생은 영해부 사건 때 한번 민중을 잘못 움직여 보복을 당한 기억이 있으니, 그 때를 교훈 삼은 것이다. 추수가 다 끝난 다음에 먹을거리가 풍부할 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한번 잘못되면 동학이 다 끝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동학은 사회변혁 운동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섣부른 행동을 삼갔던 것이다. 


해월 선생은 여러 지도자들과 의논해 10월에는 궐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제일 먼저 공주에 모이라고 했다. 충청 감사를 상대를 해서 우리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생님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그것 외에도, 당시 조선의 경제는 외세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영국이 중국에 공장을 지어 놓고 인천으로 싼 옷감이 들어오고 일본인들이 중간에서 엄청난 중간이윤을 남겨 먹었다. 또한 그 해에 일본이 쌀이 부족했던 모양인지 우리나라의 쌀을 모조리 가져간 뒤 비싸게 되팔았다. 농촌이 피폐해진 것이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을 통해 자유무역을 보장하게 했다. 이미 대만도 점령했지만 상품시장으로는 별게 없었고, 장차 중 국도 넘볼 수 있고 하니까 조선을 병탄하려 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교조신원에 민중들의 염원을 반영해서 보국안만 (輔國安民),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함께 내 건 것이다. 

외세에 반대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동학을 탄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관으로부터 촉 잡히지 않으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모이라는 공 문에는, 공주로 모여라, 20일까지 모여서 21일부터 시작이 된다. 접주들은 청주 솔뫼로 와서 지시를 받아라. 쌀을 넉넉히 가지고 와라,  5,6일 먹을 쌀, 노자를 넉넉히 가지고 와라. 의관을 정제하고 오라고 했다. 정장을 하고 오라는 얘기다. 그리고 사람을 아무나 데리고 오지 말고 사리를 분간 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와라, 그리고 함부로 얘기하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그때의 공문이 남아있긴 한데 겉장만 남은 게 대부분이다. 어떤데는 1천명이 모였다고 하고, 한 달을 넘게 있었다고하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다. 김홍집 내각의 내부 담당 김윤식의 기록에 통에는 천 명이 한 달간 모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분명하다. 정장을 한 점잖은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사람들은 동학에 대해 흉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걸 보고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어지지 흝어지지 않으니까 군대를 풀어서 해산시킬 생각은 못하고 관에서도 동학도한테 잠도 재워주지 말고 밥도 주지 말라고 강제로 명을 한다. 그러다 충청 감사가 확답을 해주고 해산을 한다. 시군에 내려보낸 감결에 동학을 금하라고 했지 왜 재산을 빼앗는가 하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그 때서야 비로소 해산이 되었다.


삼례집회 

그 다음에 삼례 집회 때도 전라도에는 사람이 더 많아서 적어도 이천 명쯤 모였지만 대표로 청원을 제출할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전봉준이 처음 나오게 된다. 그때부터 전봉준 고부 접주하고, 남원접주 유태흥이 나온다. 이 기록이 남원 동학사에 나온다. 몇몇 교수들은, 월간조선에서 전봉준이 입도한 사실조차 없다는 주장을 한다. 사학계에서는 이걸 인정도 안 한다. 자료가 나오는데도 생각을 안 고치고 있다. 

사람들이 물러가지 않고 자꾸 자꾸 몰려들었다. 전라도 감사 이병직은 공주 집회를 무마한 충청 감사 조병직처럼 정치 수완이 없었다. 관에서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싶어서 군대를 풀어서 해결하려고 김시풍이라는 용장을 내보낸다. 300명쯤 되는 군대를 내 보내는데 장수가 가서 동학대표 나오라고 해도 꿈적하지 않았다. 도인 중에 서인주라고, 서장옥이가 만나 담판을 하는데, 무관이라 말이 유창하지 못했던 것 같다. 눈싸움을 하는데, 서인주는 언변과 수완이 좋았다. 장수 김시풍이 눈싸움에 져서 돌아가 이대로는 풀어지지 않겠 다고 보고 한다. 그러자 전라감사는 지방 정부의 권한이 아니니 중앙정부의 명을 거스르지 말고 물러가라고 했으나 듣지 않자, 공주에서의 감결과 똑 같은 내용으로 내려 보낸다. 명분을 얻고 동학도인들은 해산을 한다.

해월 선생은 직접 행동에 참여 하지 않았다. 영해부 사건 때도 사람들이 떠나는 걸 보고는, 사람들이 돌아올  것을 대비해 잠자리와 식사를 준비한다. 공주, 삼례에서는 각 지역에 공문을 보내 부당한 탄압을 금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 했지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돈 바치고 얻은 군수자리니 본전 건지려고 동학을 평계로 재산 빼앗는 일을 그만 둘 리 없었다. 중앙정부에 소를 올리자고 했는데 정부가 접수도 안 하고 돌려보낸다. 기각도 아니고 각하 시킨 것이다. 한양으로 올라가자 해서 광화문으로 몰려가 직접 복소를 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학군은 집단행동의 경험을 축적한다. 공동취사를 하고 대중 행동 상당한 교훈, 경험을 쌓아간 것이다. 동학혁명을 일으 킬만한 훈련이 된 것이다. 해월 선생은 제발 똥, 오줌을 잘 가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동학군이 머물다. 간 곳에는 흔적 이 남지 않았다. 떡이나 엿을 사먹으면 철저히 물건 값을 지불하고, 신사적인 행동을 하라고 강조한 것이다. 예전의 동학과 같으면 아마도 천도교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 것이다. 


미래 사회를 그리는 대안적 예언

민족의 미래는 대화를 통해 개척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남북한에 통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미래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어떤 나라를 세워야 할지 원칙을 제시해야 하는 게 아닌가, 북한은 사회주의, 남한은 자본주의를 고집하면 통일은 어렵다. 먼저 북한의 생활수준이 높아져야, 원료, 공산품 등이 원활히 왔다갔다 하게 된다. 그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그 다음에 대화를 해서 연방정부의 형태 같이 나가다가 이것이 불편하니 하나의 헌법으로 통일을 하자는 식으로 단계적인 과정을 밟아야 하지 않을까. 돌아가신 송건호 선생은 통일문제에는 민족적 차원과 국민적 차원의 관점이 있는데, 국민적 차원에서 보면 이대로도 잘 먹고 잘 사니까 적극적일 수 없고 민족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통일된 이후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잘 사는 사람도 못 사는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누가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든 종교지도자든 미래 사회에 대한 대안을 던지는 거다. 당시 해월 선생이 보국안민이다. 신분제 타파 같이 미래 사회에 대한 예언적 말씀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경상도는 이미 신원운동 때 아픈 기억(영해부 이필재 사건) 이  남아있기 때문에 많이 몰려들지 않았지만 충청도와 전라도는 백제 이후 차별에 대해 쌓인 설움이 많았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아보고 싶은 욕구가 잘 맞아 떨어지면서 동학이 뻗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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