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6일
동학혁명의 진행과정은
1 민요(民擾) 단계
2. 혁명으로 발전한 단계(전주성 점렴)
3.외국군대의 간섭과 집강소 설치한 과정
4. 일본군과의 전투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지난 시간에 동학혁명의 성격에 대해 말했듯 ‘동학혁명' 으로 보는 입장은 동학의 개혁운동의 연장선으로 동학혁명을 보지만 농민전쟁으로 보는 학자들은 동학과 갑오년 혁명을 별개의 사건으로 각각 끊어서 분석한다.이들은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정약용의 영향, 실학의 관련성 등을 연관시켜서 설명하려고 한다.
갑오년 혁명을 동학과 직접 연관이 없는 농민전쟁으로 보는이들이 근거로 삼는 것 중 하나가 고부군 중산리 입석동 송두호의 집에서 혁명을 결의했다는 내용이 담긴 '사발통문' 이다. 사발통문에 대해 일본 학자 세 사람은 사실과 다르다고 부정하고, 국내 학자들은 10명 중 2명 정도만 부정하고 나머지는 대개 인정하는 추세다.
동학에서는 사발통문에 대해 별로 높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1) 전통적인 동학의 통문은 우측으로부터 통문(通文), 내용(內容), 날짜, 보내는 이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해 '사발통문' 은 일자, 받아보는이, 里집강, 내용이 표기돼 있고 하단에 사발모양의 원형 서명이 표기돼 있다. 사발통문의 이 형식은 일제시대 이후의 공문 양식과 동일하다. 2) 사발통문의 내용은 탐관오리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를 점령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내용이다. 당시로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이것을 고부군의 리집강들에게 발송했다는 내용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고부군의 당시 전체 인구를 통틀어도 1만 명도 안됐을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내용을 모든 리집강들에게 통문으로 돌렸다는 것도 사실성이 떨어 진다. 3) 고부 군수 조병갑이 원래 면세지인 진황지(陳荒地- 개간한 황무지)에 세금을 물리고, 정읍천의 만석보 아래 필요도 없는 보를 새로 쌓아 부당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학정을 거틉하자 1893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이 장두(狀頭)가 되어 등소(等訴)를 올린 바 있어 이미 장두가 누구인지는 다 알려져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장두를 감추기 위해 사발을 대고 원형 서명을 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4) 반역을 선동하는 심각한 내용인데 문장 서술이 '~ 했다더라' 하는 식의 기사제라는 점도 통문의 사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학자들이 사발통문을 근거로 갑오년 혁명이 동학과 관련이 적은 농민들 의 봉기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다.
민요에서 혁명으로 2차에 걸친 민요와 등소(等訴)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변한 게 없었다. 학정을 펼친 조병갑은 조대비의 집안인 세도가 풍양 조씨 집안의 서자라고 한다. 그의 모친은 평양기생 출신이라고 한다. 조병갑은 1892년 고부에 부임했다. 고부에는 향교가 있을 만큼 큰 현이었고 너른 평야와 해안을 끼고 있어 물산이 풍부했다. 그만큼 수탈이 용이했기 때문에 탐관오리들은 이 지역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2차에 걸친 민요와 등소를 이유로 조정에서는 1893년 계사년 1월에 조병갑을 파직했다. 그러나 중앙의 든든한 배경을 가진 조병갑은 신임군수들이 왔는데도 한 달 동안 고부를 떠 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다.
짧은 시기 동안 무려 여섯 명의 군수가 갈려나가자 전라감사 김문현이 중앙에 장계를 올려 조병감은 채 다 못 걷은 세금을 마저 걷어야 하기 때문에 복직해야 한다고 주장해 복직된다. 당시에는 매관매직이 당연시 될 만큼 삼정이 문란한 상황이었다. 평양감사는 80만 냥, 경상감사는 60만 냥으로 가격이 정해져 있었다. 김문현도 20만 냥으로 관직을 산 자라 는 설이 있다. 중앙에 조씨 집안 든든한 배경을 가진 조병갑을 비호한 것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이 단일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같아 단결을 잘 한다. 이에 비해 농민 들은 밥먹고 사는 형편이 다 달라 원래는 잘 단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관리들의 탐학 때문에 다들 죽기 일보직전의 극악한 조건이라 단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초기 민요 단계에서 동학의 조직적인 동원 외에 궐기한 일반인 요군들도 더 이상 견될 수 없는 학정 때문에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전봉준이 훈장을 할 때 제자였던 박정기(定基)가 70세 때 쓴 회고록 '석남역사(石南歷事)' 에도 기록되어 있듯, 지도부는 열흘 전부터 준비를 마치고 1894년 1월 8일 통문을 돌려 교도들에게 말목장이 서는 9일에 저녁을 먹고 장터로 모이게 한다.
오지영 등 동학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은 금구 용계 김덕명의 집을 거쳐 태인 주산리 최경 선의 집에 들려 의논을 정한 후 무장을 모아 300명을 인솔해 말목장터로 향했다. 전봉준은 사전에 치밀한 봉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대접주 김덕명과 상의를 한 것도 기포를 위한 조직적인 논의 때문이었다. 1월 9일 밤 장터에서 걸군패가 풍물을 치고 수천 명이 모여들자 무장한 300명이 이를 둘러 싼다. 전봉준은 , 군중들을 향해 '아녀자와 노약자는 울러나고 탈출하는 자는 사살하겠다고 한 뒤 조병갑의 불법과 약탈과 탐학을 문죄(問罪)하러 가자!' 고 하니 모여든 사람들의 피가 끓었다고 한다.
1월 10일 새벽, 약 500명이 고부관아를 향해 출발 했다. 오솔길이 좁아 두 길로 나뉘어 갔다. 새벽 2시경 고부에 당도해 관아를 점령했다. 조병갑 부자는 이미 달아났다. 창고에 쌓여있던 진황미 등을 백성들에게 배분했다. 전봉준 장군은 18개 고을에 공문을 보내 고부사람 모두가 민회에 참가하게 했다. 모두가 참여하게 해 공동운명체가 되게 한 것이다. 1월 16일 혁명군은 식량문제와 감영군 출동 등을 영려해 다시 말목장터로 이동했다. 고부민요에 대해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병갑 복직을 요청했던 자신의 난처한 입장 때문에 한 달이나 지난 뒤인 2월 15일에야 조정에 보고를 올린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감사에게는 '월봉 3등' 이라는 1기분의 월급을 주지 않는 가벼운 처벌을 내리고 조병갑을 잡아서 문초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후임 고부군수로 용안(龍安) 현감 박원명(朴源明) 안핵사로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를 임명했다.
박원명은 2월 19일경 고부로 부임한다. 이 소문을 듣고 몰려온 민요군들에게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줄 테니 해산할 것을 종용한다. 후임 군수에게 확실한 약속을 들으러 왔던 군중들이 다시 돌아간 것을 두고 민요가 해산했다는 기록을 남긴다. 그런 상태에서 16명의 감영 군이 장사치로 변장하고 무기를 숨긴 채 말목장터에 있는 전봉준을 제거하러 들어오다 모두 체포된다. 3월, 안핵사 이용태가 800명의 역졸을 이끌고 움직이자 전봉준은 전략적 요충지랄 수 있는 백산으로 이동한다. 해발 47.6미터에 불과한 백산은 들판 가운데 있어 이십 리 밖을 내다볼 수 있고 삼면이 가파른 지형의 요충지이며 식량을 조달하기도 용이한 곳이었다. 전봉준 장군은 함열에 있는 조창(漕倉)을 쳐 백성을 갈취하던 조창의 관리를 징치하라고 명 하나 민군들은 이를 따르지 않는다. 자신이 거주하는 군(郡) 내에서의 민요는 백성의 의견 표출 활동으로 보지안 군 경계를 넘어서 함열의 조창을 공격하는 것은 반역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민군은 이탈하고 동학군 몇 백 명만 백산으로 이동했다.
보국안민창의거(輔國安民倡義擧) 혁명의 단계로 발전
3월 1일 동학군은 포구 건너편에 있는 부안군 줄포의 세고를 털었다. 안핵사가 출동하고 감영군이 대응하는 것을 보면서 전봉준은 결사전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2월 28일 김덕명, 김계남, 손화중 세 사람의 대접주와 주요지도부가 모여 보국안민창의거(輔國安民倡義擧)를 명분으로 내걸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道大將)으로 추대한다. 기록에는 3월 28일 '동도대장기' 가 나부꼈다고 되어 있다.
동학군은 3월 12일경 현재의 풍천 인근의 산골인 임천(林川)에 모였다가 무장현의 동음치면 (현재의 동음면) 구수리 당산으로 이동했다. 당산은 바닷가지만 외진 곳이라 군중이 모여 있기 적당한 곳이다.
기록에는 당산에 5일간 체류했다고 한다. 군대가 이동한 이유는 전주 감영과 가까이 있는 원평의 김덕명포가 전주감영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동할 필요가 있었고, 임천은 줄포의 세창을 털어 배로 식량을 옮기기에 적당하고 산중이라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대 인원이 은거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봉준을 대장으로 한 동학군은 강령과 군율을 세워 동학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민중의 군대로서의 자세를 견지했다.
동학군의 4대 명의(名義)
1.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부수지 않는다(不殺人 不殺物)
2. 충효쌍전(忠孝雙全) 제세안민 (濟世安民)
3. 왜놈을 몰아내고 성도를 맑게 한다(逐滅倭夷 澄淸聖道
4. 군사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진멸한다(구병입경 진멸권귀驅兵入京 盡滅權貴)
동학군 스스로 내세운 군기에 『적(敵)을 대할 때 무기(武器)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수공(手功)으로 삼고,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인명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귀(貴)히 여기며, 매양 군대가 지나갈 때에는 사람의 물건을 해치지 말고 효제충신(孝悌忠臣)이 살고 있는 촌락 10리(村落 10里) 이내에는 주둔하지 말라』고 하였다.
동학군의 12 군율
1, 항복하는 자는 대접을 받는다. (항자수대 降者受待)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곤자구제 困者救濟)
3, 탐욕한 자는 쫒아낸다. (탐자축지 貪者逐之)
4, 순응하는 자에 경복한다. (순자경복 (順者敬服)
5, 도망하는 자는 쫓지 말라. (주자물추 走者勿追)
6, 굶주린 자는 먹을 것을 준다. (기자궤지 飢字饋之)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없애버린다. (간활식지 奸猾息之)
8, 가난한 자는 도와준다. (빈자진휼 貧者賑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불충제지 不忠除之)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역자효유 逆者曉諭)
11, 병자에게는 약을 준다. (병자급약 病者給藥)
12, 불효한 자는 죽인다. (불효살지 不孝殺之)
3월 28일 전주를 향해 출발한 동학군은 4월 4일 금구에 당도한 뒤, 감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후퇴해 부안을 점령한다. 동학군은 처음에는 정부군과의 접전을 피한다. 폐정개혁의 지향을 분명히 했지만 왕실에 대해서는 충(忠)' 을 강조하던 입장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점령한 부안에서는 세제를 개혁하는 등의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부안을 거쳐 태인까지 후퇴를 거듭하자 감영군 700명, 보부상 1천여 명으로 이루어진 관군은 동학군이 오합지졸들이라 싸움 엄두를 못 내고 달아나기만 한다고 생각해 의기양양, 4월 11일 약탈과 부녀자 겁간 등 행패를 부리고 민가의 닭과 돼지를 잡아먹고 술에 취해 잠이 든다. 동학군의 후퇴는 왕의 군대와 싸움을 회피한 것도 있지만 전술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도고산(道舊山) 황토현(黃土)에서 동학군은 방심한 관군을 야습, 대장을 살해하고 대부분의 관군은 달아난다.
관군은 보급도 제대로 안돼 사기가 떨어져 있었고 훈련이 안 된 부대였다. 대부분 달아나고 450명만 남아 있는 상황이라 중앙에서 파견된 홍계훈은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고 대결을 피했다. 중앙으로부터 4월 22일에 증원군을 보내겠다는 전문이 4월 16일 내려온다. 4월 21일, 홍계훈의 경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동학군은 밤중에 부대를 빼돌려 영광으로 내려보낸 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전주로 진격해 4월 27일. 텅 비어있던 전주에 무혈입성해 장악한다.
이 소식을 들은 홍계훈 부대는 하루 뒤 전주에 도착한 뒤 성 밖에서 대치한 상태에서 4월 29일, 조정에 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올린다. 4월 30일, 조정에서는 긴급 대책회의가 열리고 그동안 청군에 원군요청을 반대하던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5월 8일, 이홍장의 휘하인 25살 원세개가 이끄는 2천5백 명의 청군이 아산만 백석포를 통해 쳐들어온다. 일본군은 청군의 파병을 구실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일본 거류인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488명의 해병대와 순사 20명을 파병한다.
청일 양국 군대에게 철군을 요구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속에 동학군과 경군은 5월7일, 전주화약을 맺고 홍계훈의 경군에게 전주성을 내준다. 애초에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군은 5월 16일 4천명의 군대로 한양 도성을 장악하고 조선 정부를 총칼로 무력화시킨 뒤 이홍집 친일내각을 구성해 주권을 침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