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일원 유적지 답사 (2005. 10. 29~31)
2005년 가을 강좌 가운데 3주차는 2박3일간 공주 일원의 유적답사로 진행되었다. 토요일 아침 서울 양재동을 출발해 마곡사 인근, 해월 선생이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법통을 전수한 가섭암, 사곡면 신평리, 전투가 벌어졌던 이인과 경천, 효포를 거쳐 갑사 인근 녹수장에서 서울경기 지역에서 온 강좌 수강생들과 광주 등 호남에서 온 분들이 함께 모인 가운데 표영삼 선생과 당시 모심과 살림연구소 소장이던 박맹수 선생(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2022년 현재 원광대 총장) 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다음날 우금치를 넘어 견준봉~두리봉, 동학군이 공주성을 점령하려다 결국 넘지 못한 산능선을 넘어 공산성을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정안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온 버스는 마곡사 앞으로 뻗은 604번 지방도로를 따라 드믄드믄 감나무가 서있는 마을들을 지나 상원계곡, 마가번드(그 곳 지명인데 무슨 뜻일까?) 개울가, 구계리 가섭암(迦葉菴) 입구에 닿았다. 그곳이 가섭암 입구라는 표식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민들조차 소상히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연로한 표영삼 선생만이 세밀하게 길을 알고 계셨다.
새로 들어선 마하연이라는 암자 표지석을 보고 진입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2,3백 미터가량 올라가면 마하연, 성불암 두 암자가 나온다. 오른쪽에 있는 성불암 입구에서 가섭암 들머리인 오솔길을 찾아 30분쯤 산길을 올라가면 가섭암에 도착한다. 『신인간』에 실린 표영삼 선생의 답사기처럼, 돌을 쌓아 터를 다진 터에 20여 평 남짓 니은자(L) 모양의 오래된 목조 기와 암자가 들어앉아 있었다. 암자 뒤로 돌아 들어가면, 바위굴 안에 작은 우물이 고요히 물을 채우고 있다. 지금도 이곳이 기도처로 쓰이고 있는지 바위굴 안 우물가에는 초가 놓여 있었습니다.
표영삼 선생님 설명에 의하면 1884년 10월, 해월선생께서 21일간 기도하실 때에 비해, 뒤에 방 한 칸을 달아낸 것말고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절터에서는 멀리 계룡산까지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물결처럼 뻗어간 풍경이 시원스레 조망되었다.
육임제를 구상한 가섭암
1884년 10월, 당시 해월선생은 관군에 쫓겨 다니던 중 단양에 거주하실 때, 스물네 살인 손병희, 그 보다 열 살 위인 박인호, 송보여 등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21일간 기도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와 머물렀다. 이곳에서 해월선생은 동학의 직제인 육임제(六任制)를 구상했다. 육임은 교장(敎長)과 교수(敎授), 도집(都敎)과 집강(執예), 대정(大正)과 중정(中正)을 말하며, 교화를 담당하는 분야인 교(敎)와 업무를 주관하고 - 기율을 세우는 집(執), 시비를 가려 강직하게 비판, 평가를 담당하는 정(正) 세 분야로 역할과 임무를 나누었다. 교장과 교수는 1급, 도집 집강은 2급, 대정과 중정은 3급 또는 4급에 해당하는 직급 서열이 있었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을 시험하다
가섭암에서 비교적 가까운 유구 장까지는 이십여 리 거리. 지금도 첩첩산중이지만 100여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외지고 은밀한 산중이었을 것이다. 산중에서 여러 사람이 이십여 일을 나려면 식량과 물건이 많이 필요했을 텐데, 표영삼 선생은 장터까지 먼 길을 늘 가장 젊은 손병희 선생께서 불평 없이 다녀오곤 했다고 하셨다. 해월선생이 손병희 선생을 시험하고, 후계자로 지목한 곳도 이곳 가섭암이라고 한다. 해월선생은 손병희 선생에게 부엌 아궁이에 솥을 걸라고 시켰다. 시키는 대로 솥을 걸었지만 해월선생은 제대로 걸리지 않았다며 몇 차례 계속 다시 뜯어서 고쳐 걸라고 시켰다. 손병희 선생은 해월 선생이 자신의 됨됨이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군말 없이 척척 아궁이를 뜯고 솥을 걸기를 반복하자 해월 선생이 "젊은이가 그만하면 쓸만하다”고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가섭암은 동학이 조직체계를 구상하고 후계자를 지목하면서 터전을 닦은 중요한 장소라고 한다. 공주우금티기념사업회 정선원 사무국장께 그 이유를 물으니, 새로 바뀐 지명들인데 아마도 해월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추정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마곡사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있는 사곡면 신평리였다. 해월선생은 1891년 2월부터 4월까지 약 2개월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호남지역 동학 조직은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각각 조직의 책임을 좌도 편의장과 우도 편의장이 맡고 있었다. 우도 편의장은 윤상호라는 이였고 좌도 편의장은 백정 출신인 남계천이었다.
"아무리 신분의 차별을 부인하는 동학이라고 해도 백정 출신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따르는 일은 힘든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호남지역에 분란이 일어나자 해월 선생이 이 지역에 내려가 도인들을 만났습니다. 해월 선생은 호남 지역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남계천을 좌우 통합 편의장으로 임명하고 '반상(班常)차별이 나라를 망치고 적서(韓康) 차별이 집안을 망친다. 수운 선생은 두 사람의 하인을 한 사람은 며느리 한 사람은 수양딸로 모셨는데 양반이 어디 있고 상이 어디 있느냐' 는 설법을 하셨다고 합니다." 해월 선생의 가르침은 반상의 차별이 엄연했던 1백년 전 사람들의 잠든 정신에 충격을주었을 것이다.
사곡리 인근에는 해월리, 해월교 등의 지명이 있었다. 공주 우금티기념사업회 정선원 사무국장께 그 이유를 물으니 새로 바뀐 이름들이라 아마도 해월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추정했다.
이인과 경천 전투
이인 면사무소는 조선시대 이인역(利仁驛)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 이인역은 찰방역(察訪驛)이라 규모가 꽤 컸다고 한다. 면사무소 맞은 편에 야트막하게 뻗어 있는 야산이 취병산이다. 갑오년(1894년) 시월, 동학군은 이인역과 취병산을 사이에 두고 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관군, 관군을 지휘하는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해 (1894년) 6월에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를 물리친 일본은 이제 안하무인으로 조선의 조정과 군대를 유린하고 지배자로 군림하고, 조선군대를 휘하부대처럼 부리며 동학군 공격을 주도 했다. 갑오년 음력 9월 29일(양력 10월 27일)에는 히로시마 대본영의 카와카미 소로쿠 병참총감이 인천의 남부병참감 앞으로 ‘동학당에 대한 초치는 엄렬함을 필요로 한다. 이제부터는 모조리 살육하라'는 학살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면사무소 앞에는 충청감사 박제순의 거사비(去思碑)가 아직도 서 있었다. 박제순은 일 본군을 공주에 계속 주둔하게 해달라고 조정에 요청을 했던 인물이다. 갑오년 10월 충청 감사 박제순에게 전봉준 장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쳐 함께 싸우자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박제순은 이를 거절하고 일본군과 협력해 동학혁명군을 몰살하는데 부역한 자였다. 뒤에 박제순은 대표적인 친일파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인에서 동쪽으로 뻗은 경천 가는 길가에는 군데 군데 떼무덤이 많았다고 한다. 표영삼 선생의 강의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아려오는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경천 역시 삼남대로상의 역이 있던 지역이다. 공주에서 남으로 우금티를 넘어 이인 쪽으 로 뻗은 길 동쪽에 곰티를 넘어 효포로 뻗은 길이 경천으로 이어져 있다. 남쪽에서 공주를 넘어가자면 왼쪽의 우금티가 아니면 오른쪽의 곰티를 넘어야만 한다. 공주는 이렇게 삼면이 경사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는 금강이 크게 휘돌아가며 도시를 감싸고 있다. 강변에는 요새처럼 공산성이 축성되어 있다. 표영삼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전라 지역 동학군이 주축인 만여 명 의 대부대가 경천에 주둔해 있다가 곰티를 넘기 위해 공격을 감행 했다고 한다. 경천은 전라도 땅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길게 뻗어있는 너른 들판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었다. 삼 남에서 몰려온 혁명군이 공주 진격을 앞두고 대오를 갖춘 곳이고, 공주 외곽의 산줄기에서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 끝에 후퇴한 혁명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던 곳이다.
통한의 곰티 전투
저녁 5시 경 답사 일행은 경천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공주쪽으로 올라가 효포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갑오년의 혁명군들도 우리와 같은 길을 따라 공주로 향했을 것이다. 지금은 살풍경한 자동차 전용도로가 곧게 뻗어있지만 당시에는 논배미 사이로 좁다란 오솔길이 공주를 향해 뻗어 있었을 것이다. 표영삼 선생님과 우금티 기념사업회 정선원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의 금강은 지금보다 훨씬 수심이 깊었고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 없지만 곰티 동쪽에 뻗어 있는 논에까지 금강의 물길이 흘러왔을 것이라고 한다. 효포(孝浦)라는 지명도 여기서 연유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효포 북서쪽으로 있는 곰티 역시 비운의 격전장이다. 근대식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대와 관군에 맞서 화승총과 축창뿐인 혁명군은 곰티 인근의 가파른 능선을 넘기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진격을 했을 것이다. 갑오년 10월 24일 혁명군의 진격에 대해 ‘산길 사십 리에 사람 병풍을 두른 듯했고, 총창은 숲을 이루고 깃발은 늘티에서 금강에 이르는 넓은 들을 뒤덮으며 공격해왔다.' 관군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비가 뿌리는 흐린 날, 혁명군은 10시간이 넘게 곰티를 공격했지만 끝내 고개를 넘지 못했다.
이튿날도 전투는 이어졌다. 전열을 가다듬은 일본군과 관군의 근대식 무기 때문에 사상자가 늘고 시신이 골짜기와 산등성이에 가득 들어찼다고 한다. 참혹한 광경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끝내 혁명군은 경천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11월 8일 우금티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호포 초등학교 앞 육교 위에서 맞은 산등성이 위 곰티 쪽을 바라보며 표영삼 선생님으로부터 공주 전투에 대한 설명을 듣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펼쳐진 야트막한 산줄기를 넘어서 공주 감영을 획득하면 서울로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왜놈들이 마음대로 '남의 국토에 와서 우리 혁명군을 무참히 도륙한 일이 분하고 원통했다. 새삼스런 분노와 격정이 몸 안에서 들끓는 것 같았다. 멀리 주미산 너머로 노을이 번져갈 무렵 답사 일행은 무거운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유적지 답사 첫 날 일정이 끝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