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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May 26. 2022

표영삼 선생 동학 강의 11-1

답사 후 강의와 다음 날 우금티 위령제

가섭암과 신평, 이인 곰티 등 유적지를 답사하고 숙소인 갑사 아래 녹수장 여관에서 저녁식사 후 표영삼 선생과 박맹수 선생의 강의가 이어졌다. 표영삼 선생은 2005년 강의의 맥락에 따라 동학혁명이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던 점, 남북 접이 갈등한 것처럼 오해하는 이들이 있지만 하나의 단일한 목적으로 합심해 싸운 점 등을 설명해주셨다.  


저녁식사 후 진행된 강의

 

동학혁명의 진행과정
표영삼

동학혁명은 입헌군주제를 통한 민주정치를 추구했다.

수운 선생은 1861년 깨달은 이후 신분제를 타파할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포덕 이후 처음 맞은 수운 선생 생일날 행한 첫 설법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니 귀천(貴賤)을 타파 하자'고 하셨다. 1893년 원평과 장내리에 3만 명이 모여 ‘척왜양창의(辰倭洋倡義)'를 외칠 때 "외국에는 민회를 구성해 나라의 주요 정책을 의논하는데 우리가 바로 민회(民會)다”라고 밝혔다. 이후 손병희 선생이 진행한 진보민회(進步民會)등 근대적 단체 운동이 추구한 것도 동학이 추구한 정체(政體)가 왕을 형식적으로 유지한 근대적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후 일본공사관에서 취조를 받을 때도 혁명에 성공하면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농사를 지으러 돌아가고 현명한 사람들을 뽑아 협의(協 議)해서 합의(合議)하게 하려고 했다'는 진술을 한다. 이 점도 동학혁명이 의회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동학이 내 건 보국안민창대의(輔國安民倡大義)의 보국(輔國)은 그냥 나라를 지킨다는 보국(保國)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도록 돕는다는 보국(輔國) 뜻이다. 동학은 미래사회에 대한 꿈, 이상으로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 대하기를 하늘님 대하듯 하는 세상을 추구했다. 이 꿈을 위해 우선은 '보국안민'이 필요했다. 보국안민은 이상세계로 건너가기 위해 현실에서 추구하는 징검다리였던 것이다. 우선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해서 이상사회로 가자는 것이다. 동학은 결정론을 부정한다. 역사는 예정된 결혼에 운명론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역사란 인간의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보국안민은 동학의 이러한 역사관을 반영한 말이었다.

남북 접 갈등설은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말이다.  목숨을 걸고 하나가 되어 싸웠다.


〈강의2, 동학혁명과 생평평화사상〉 - 박맹수 (모심과살림연구소장, 현 원광대 총장)

갑오년 혁명 당시 전국 340여 개 현 가운데 170여 곳에서 동학혁명군이 궐기했으며, 박은식 선생의 <조선통사>에 의하면 갑오년에만 무려 30만에서 5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당시 인구를 800만에서 1200만 명으로 추산할 때 전국에서 250만에서 350만 명이 동학 혁명군으로 궐기했다는 것인데, 전 국민의 삼분의 일이 동학혁명에 참여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 엄청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를 보면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05년에 천도교가 합법화될 때까지 무수히 많은 민중들이 죽임을 당했다. 비가 오면 격발도 되지 않는, 사거리 40, 50보에 불과한 화승총이나 낫과 괭이 같은 농기구를 들고 사거리 400m의 근대식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향해 수많은 동학혁명군이 생명을 내던진 것이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이 생명의 본성인데, 그들은 왜 그랬을까. 김지하 시인은 우리 몸 안의 신명과 우주의 신명이 공명할 때 우리는 죽음도 뛰어넘는 엄청난 분출을 하게 된다고 했다. 동학의 궐기는 그런 것이었다. 외국 군대의 총칼에 짓밟혀 도탄에 빠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한 민중들이 죽음을 뛰어넘어 폭발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을 구현하려는 절규요 외침이었다.


동학에 대해 몇 가지 오해

1) 동학이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주장에 대해

 동경대전에 ‘도즉천도 학즉동학(道則天道 學則東學)’이라고 했다. 도(道)는 사상적 원리와 철학을 가리키고, 학(學)은 실천을 위한 학문적 방법론을 말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동학(東學)은 동국(東國)의 학문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서학(西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운즉일야 도즉동야 이즉비야(運則一也 通則同也 理則非也)”, 운(運)은 시대적 상황, 도(道)는 보편적 원칙, 이(理)는 특수한, 개별적 대응 논리라고 볼 때, 서학(西學) 즉, 기독교나 천주교와 동학은 모두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은 같지만 이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양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2) 동학은 ‘유불선(儒佛仙)+서학(西學)+민간신앙'을 모아서 만들어낸 종교라는 주장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것저것을 합쳐서 비빔밥처럼 어떤 종교가 만들어진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겠는가, 동학은 일관된 사상체계로 세계를 독창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시천주:내 안에 한울 - 우주 생명 - 이 모셔져 있다)


3) 갑오년의 투쟁(혁명)만으로 인식

동학농민혁명은 후천개벽을 이루기 위한 정적, 동적 개벽의 길이었다. 부분적 시나리오로 동학 전체를 색칠하는 것은 맞지 않다. 혁명의 실패가 곧 동학의 실패는 아니다.

■수운 최제우

1) 선생의 부친 근암공은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학자였다. 선생이 태어난 경주지방은 안동 등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고 근암공이 교류한 유학자들이 무려 4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여강 이 씨 회재 이언적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이분이 퇴계 이황 선생에 닿아 있었다. 또한 경주는 신라 천년의 꿈이 담겨 있는 지역이었고, 경주 남산은 불교적 이상향을 실현한 곳이었다.

2) 수운 선생은 근암공에게 재가한 한 씨(韓氏)의 소생이었다. 총명해서 부친의 총애를 받았지만 신분적 제약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 때 응시가 허락된 무과를 준비하기도 하고 10여 년 동안 장사길을 방랑하기도 했다. “용담유사”에 ‘군붙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 부불부(父不父) 자불자(子不子)', 임금이 임금이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 니며 아비가 아비가 아니고 자식이 자식이 아니라는 말은 파괴된 질서와 시대적 혼란상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고 수운 선생이 겪은 고난을 반영한 문장이기도 할 것이다. 수운 선생은 유교적 학문 전통과 경주라는 지역의 불교문화적 배경이 토양이 되고 시대적 혼돈과 감당키 어려웠을 신분적 제약 등에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고난이 자극이 되어 수련에 정진하게 했고 이를 통해 위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해월 최시형

해월 선생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 동학을 실천적으로 사회화시켰다

2) 무너진 통학을 천국적으로 조직화  

3) 중간지도자 양성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보다 세 살 어린 1827년생이다. 해월 선생이 안 계셨다면 수운 선생 역시 역사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운 선생의 깨달음을 현실화시킨 분, 존재할 수 있게 한 분이 해월 선생이다. 동학에서는 포교(布敎)가 아니라 포덕(布德)이라고 한다. 덕(德)은 도(道)를 행하는 것이다.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이 1861년에 깨닫고 3년간 포덕 하다 1864년에 처형된 뒤부터 1889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관군에게 쫓기며 경전을 간행하고 설법을 행하고 조직을 만들면서 동학의 기틀을 닦았다. 1864년 수운 선생이 처형될 때 주요 핵심 지도자들이 함께 처형되었고, 겨우겨우 재건의 기틀을 다지다가 1871년, 요즘 분류로 치면 직업적인 혁명가랄 수 있는 이필제가 주동이 된 영해 신원 운동 때문에 또다시 30여 명이 처형되는 어려움 속에서 '고비원주(高猿走)'의 도피 생활을 계속하며 전국 200여 곳에 동학의 비밀 포교 지를 만들었다.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은 곳에 조직의 씨앗을 퍼트렸을 것이다. 동학사상을 사회화하고 조직을 전국적으로 재건한 것이 바로 해월 선생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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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선생이 사람을 키우는 방식

해월 선생은 손천민 손병희 서장옥 같은 제자들의 성장을 위해 꼭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 수련하는 방법을 택했다. 1890년에 서장옥이 구속되었을 때 선생은 온종일 비를 맞고 걸은 뒤에도 이불을 안 덮고 한데 잠을 잤다고 한다. 옆에서 아무리 권해도 ‘서장옥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따뜻한 잠을 잘 수 있겠는가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자들이라면 과연 스승을 위해 목숨이라도 걸고 싶지 않겠는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가능한데, 우리는 혹여 ‘進步萬能', 당위성만을 앞세우는 우를 범해오지는 않았는지 다시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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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 위령제 (2005년 10월 30일)

 

다음날 일정은 우금티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우금티를 끼고 있는 견준봉과 두리봉을 거쳐 공산성이 있는 공주 시내까지 산행을 하기로 했다. 동학혁명군이 그토록 넘고 싶었을 그 길이다.

 

아침 9시, 일행은 우금티로 향했다. 우금티 위령제는 목포 극단 갯돌과 청주의 씨알누리가 함께 진행해주셨다. 열림굿으로 시작한 위령제는 몸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 스스로를 향해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상차림을 거쳐 전국의 참석자들이 들고 온 각 지역 막걸리를 하나로 섞은 합환주를 동학혁명의 영령들과 위령제 참석자들이 함께 나누어 마시는 의식을 거쳐 한살림서울 김민경 부이사장이 추모사에 해당하는 심고(心告)를 거쳐 표영삼 선생과 박명수 소장이 위령탑 앞에 분향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어서 진행된 해원상생굿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흐느끼게 만들었다. 부산에서 온 임현미 씨의 초혼(招魂) 춤은 격정을 분출하는 폭발적인 몸동작과 안으로 갈무리하는 절제된 동작이 이어지면서 붉게 물든 견준봉의 단풍을 배경으로 경탄스러운 장면들을 연출해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냈습니다. 목포의 극단 갯돌과 청주에서 온 씨알누리는 초혼의 춤에 화답하듯 갑오년에 희생된 선조들의 처연한 모습을 재현했다. 상처와 고통을 스스로 닦아내 며 서로 부둥켜안고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한판 굿이 벌어지는 동안 사람들 은 소리 내 흐느끼기도 하고 슬픔을 지그시 눌러 삮이느라 애를 쓰는 표정들이었다.

원과 한을 풀 듯, 흰 무명천을 가르는 의식으로 해원굿이 끝났다. 이어서 힘찬 풍물소리와 함께 대동풀이 한 마당이 이어졌다. 원혼들을 상징하듯 종이로 오린 사람들을 촛불에 태워 하늘로 재를 날려 올리고 제상에 차려졌던 음식을 음복하고 팔도 막걸리가 뒤섞인 합환주를 나눠 마시면서 전국 각지에서 온 서로를 포옹했다. 사회를 맡았던 광주 녹색연합의 정호 사무국장님이 '이제 우리 서로 미워하지 맙시다' 하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았다.

위령제가 끝난 후 공주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금티 우측으로 공주를 감싸듯 뻗어있는 견 춘봉~두리봉 능선을 등산했다. 우금티를 넘어 이인 쪽으로 뻗은 국도는 한창 확장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 공사가 끝나면 우금 고개에는 터널이 통과하게 될 것이다. 1973년에 위령비가 우금티를 넘어 공주 쪽에 세워진 것은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결국 우금 고개를 넘지 못했던 수많은 동학 혁명군의 넋이라도 위로하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금방 때 이른 눈발이라도 날릴 것 같은 음울한 날씨에 아직 공사 중인 터널을 통과해 견준봉 들머리에 섰다. 큰 느티나무 당목에 오색천이 휘감겨 있었다. 숱한 원혼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자리라고 여겨졌다. 견춘봉 오르는 길은 당목 곁으로 뻗어있는 오솔길을 들머리로 잡아 시작했다.

마치 빗발치는 총탄에도 아랑곳 않고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던 동학군의 심정이 되어 음울한 산길을 걸어 올랐다. 숲길은 스산했고, 작은 언덕과 골짜기들마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박맹수 소장, 우금티기념사업회 정선원 사무처장의 설명처럼 견준봉 (속칭 개좆빼기봉)은 정상 부분에 가파른 경사로 벽이 둘러쳐진 것 같았다. 공주가 천혜의 요새라는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견준봉 두리봉을 넘어 금강이 휘감아 돌고 있는 공주시내를 내려다보며 우금티 기념사업회 회원들께서 공주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철도가 대전으로 나기 전까지 공주는 충청감영이 있던 충청도의 중심지였다. 동학혁명군이 공주로 집결했던 것도 서울로 쳐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안타까움, 구국의 일념으로 외세에 대항해 목숨을 던져 싸우다 돌아가신 수많은 민초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안고 산줄기를 내려서서 공주경찰서 옆 시내에 내려섰다. 바로 인근에 하고개에 이어진 송장배미가 있었다. 희생된 동학군들이 더러는 산 채로 매장을 당하기도 한 논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운 연못으로 변해 있었다. 송장배미 앞에서 각 지역에서 온 답사 일행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많은 분들이 우금티의 함성을 이해하고 기억하며 생활 속에서 구현하려는 사람들의 만남이 앞으로도 이어져야 한다고  말씀들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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