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하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 (9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한국에서 망했던 프로젝트였는데 그 결과가 너무 좋아 이번에 인도 지점에서 벤치마킹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망했다’고 판단한 것은 투자한 돈에 비해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고 지원자들에게 그 프로젝트를 기억하냐고 물어봤는데 알고 있는 사람이 미미한 내부 직원들만 알고 있던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본사 사람들의 발표 내용은 ‘대단히 성공한 프로젝트’ 였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여러 가지 KPI (성과지표) 중에 눈에 띄는 점수만 뽑아다가 그럴싸한 사진과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본사는 다른 항목이나 지표를 보며 디테일하게 ROI (투자 대비 수익)를 보지 않고 손뼉 치고 회의를 끝낸다. 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소위 내가 지나다가 쓰레기를 한번 주워서 “야~ 내가 쓰레기를 치웠어”라는 내용으로 PPT 20페이지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사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우리 팀에서 농담 삼아 “e-mail specialist”라고 부르는 직원이 있다. 이 직원은 본인이 하는 프로젝트마다 몇천 명이 넘는 한국지사의 모든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쓰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물론 여러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좋은 취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람 도대체 누군데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주 메일을 보낸다. 그 직원의 진짜 직무는 아직도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는 그저 메일만 보내는 email specialist 이기에 붙은 별명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 직원이 일 잘한다고 아주 칭찬받고 있는데 사실 본인이 보낸 메일 내용들이 어떻게 follow up 되고 있는지는 그 사람한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기에 남들이 겉으로 봤을 때는 우리 회사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인 것이다.
모든 외국계 회사가 그렇지는 않지만 보여주기 식의 근무형태는 오히려 외국계 회사 (특히 매출이 잘 나와 딱히 망할 일이 없는)가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회사는 워낙 결과가 중요하기에 정말 쏟아부은 돈 이상의 성과가 나왔는지 확인하고 중간보고를 한다면 비즈니스가 잘 운영이 되는 외국계 회사의 경우 과정에 많은 노력을 쏟아 비록 실패할지라도 어떠한 learning (배움)이 있었는지를 잘 포장해서 말하면 그 또한 하나의 성과로 인정받는 것이다.
조직개편으로 인해 우리 부서와 연관된 다른 업무를 하는 담당자가 바뀌고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실수가 많아 부서원들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직개편을 담당했던 높은 임원이 우리 매장에 오게 되었는데 난 마침 오후 출근이라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부서원들이 행여 그녀에게 불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봤자 불만 많은 직원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나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출근하여 직원들에게 물어보았다.
“아, 우리가 뭐 한두 번 하나요. 너무 잘 도와주고 있고 조직개편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대답했어요.”
슬프게도 역시나 우리 직원들도 외국계 회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안 좋은 것, 잘못하고 있는 것을 말해봤자 내가 해결할 수 없으면 살짝 덮어놔야 한다. 잘되고 있는 것만 잘 포장해서 보여주면 된다. 나 역시 이것을 깨닫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요즘도 사실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날이라도 누군가 how are you?라고 물으면 억지웃음 지으며 very good이라고 외치는 정도는 되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