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차 Mar 03. 2018

파수꾼(2010), 폭력이라는 언어

 학창시절, 내게 3월은 늘 전쟁터였다. 새 학교, 새 학기에 만나는 새로운 친구들. 앳된 얼굴을 한 아이들은 치열한 탐색전을 벌였다. 누굴 가까이하고 누굴 멀리할지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다. 별 탈 없이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은 모두에게 마찬가지였으니까.

 꽃들이 한차례 피어났다 질 때쯤이면 대부분의 것들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완벽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크고 작은 갈등들이 일어났다. 때로는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채 미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말로는 서로 친구라고 하지만- 불편한 속내를 숨기고 지내는 관계도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에 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무엇이 더 우정에 가까울까? 서열이 정리된 뒤 장난이라는 이름하에 저질러지는 행동과 동등해 보이는 관계 속에서 미묘하게 벌어지는 기싸움과 경쟁 중에서 말이다. 이런 관계들은 우정이라는 이름을 한 채로 종종 목격된다.

 영화 <파수꾼>은 남자 고등학생들이 맺는 일반적인 교우관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친구들 사이에 적당한 서열이 정해지면 웬만해서는 아무도 그것을 깨트리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서열 속에서 우정은 폭력의 언어를 통해 전개된다. 서열이 높은 소년은 가벼운 장난부터 시작해서 ‘패륜 드립’을 하거나, 담배 망보기를 시킨다. 서열이 낮은 소년이 그것에 장난처럼이라도 반기를 들면, ‘많이 컸네’라는 말을 듣는다. 정글과도 같은 교실 속에서 가장 빠르고 확실한 소통을 보장해줄 수 있는 언어는, 폭력이다.

 <파수꾼> 속의 주인공인 기태와 희준, 동윤 무리도 다르지 않다. 소년들은 일상적으로 서로에게 작은 폭력을 행사하고, 기꺼이 그것을 우정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희준이 자신의 절친이자 학교의 ‘짱’인 기태의 심기를 건드리는 순간이다. 기태에게는 어머니가 없고, 무심한 아버지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태에게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친구가 전부이다. 친구인 희준을 의식해서 자신에게 고백한 매력적인 여자아이를 거절하기도 한다. 그런 기태의 뇌관인 어머니의 부재를 희준이 의도치 않게 자극하자, 기태는 상처를 받는다. 기태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두 가지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굴거나, 희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 정글 속에서 소년들이 배운 언어는 가식과 폭력 두 가지 뿐이었다. 

 희준과 화해를 시도하지만 거절당한 기태는 희준을 무섭게 괴롭힌다. 때리고, 욕하고, 밤중에 불러내 모욕감을 주려고 한다. 희준은 이에 오기로 맞선다. 기태는 그런 희준에게 폭력을 휘두르다가도 돌변해 용서를 구한다. 희준은 날카로운 말로 기태의 집착을 끊어낸다. 착각하지 말라고. 학교 다니기 편하니까 너랑 다닌 거지, 단 한 번도 너를 친구로 생각한 적 없다고. 그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라고. 이 한마디로 기태의 마음과 ‘짱’이라는 서열이 모두 무너져 내린다. 게다가 기태의 폭주를 막으려던 또 다른 친구 동윤 또한 기태의 행동에 상처를 입고 기태를 떠난다. 기태의 외로움은 전반부의 희준-기태-동윤 셋이서 공놀이를 하는 장면이 후반부의 기태 혼자 공을 가지고 노는 장면으로 전환되며 증폭된다. 마침내 기태는 모든 것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기태를 바라보는 희준.

 영화는 기태의 폭력 뒤에 곧바로 기태의 죽음을 보여주고, 후반부에 가서야 기태의 심리를 묘사한다. 폭력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오가며, 관객은 기태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버지처럼 진실과 단절되는 기분을 계속 느끼게 된다. 이는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폭력과 가식뿐인 소년들이 진심을 교류하지 못할 때 느끼는 단절과 유사하다. 우리는 소년들의 악함을 탓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실의 모순을 탓해야 하는가? 폭력은 선택일까, 아니면 모국어처럼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일까?

 교복을 벗고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이따금씩 ‘성숙한 관계’ 뒤에 숨은 폭력을 목격한다. 미묘한 서열과 기싸움이 자꾸만 내게 불편함을 유발한다. 그럴 때면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인간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순수한 우정은 그저 순진한 이들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폭력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연민을 하는 것에 그쳐야 할까. 우리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려고 시도할 때 관계의 크고 작은 비극들을 피할 수 있지는 않을까. 사랑이라는 이유로 묵인되었던 데이트폭력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우정과 폭력이라는 양 극단을 오가는 행동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제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다른 언어를 찾아가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