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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기록자 Feb 13. 2019

어느 날 나도 퇴사 준비생이 됐다

- 한 통의 카톡으로 끝난 8년

나는 현직 기자다.

정확히 하자면, 앞으로 45일 동안은 휴직 기자다.

만나는 사람마다 방송이나 일명 조중동한경으로 불리는 메이저 일간지를 떠올렸지만 내가 일하던 곳은 지방지다.

굳이 덧붙이자면 지방지 중에서는 두 번째로 큰 규모이고, 신문 발행부수로 치면 10등인가, 11등 정도 하는 그런 회사에 다녔다.

재직증명서를 떼면 다니는 중이지만, 휴직 중이니까 다녔다는 표현이 맞겠지.


오늘, 회사로부터 휴직 연장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미 2012년 입사 후 두 번째 휴직이기에, 또 회사에 전례 없는 휴직을 요청하고 허가받았기에

휴직 자체가 고마웠다.

두 휴직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남편이 외국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국내외 수학, 연수 등을 위해 휴직을 요청한 때"에 해당해 최장 2년까지 휴직이 허용되는 사규의 적용을 받았다는 점이다.

차이점도 있다. 명분과 일치하는가이다. 첫 번째 휴직 때는 그 휴직을 정당화하고자 영국에서 1년간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으니 휴직 목적에 부합한다. 두 번째 휴직은 기본급 일부를 지급하는 병가 대신 좀 더 긴 기간의 휴직을 보장받았는데, 병가의 원인은 '난임'이었다. 진단서를 준비했으나, 꺼내기도 전에 묵살당했다.

그렇다. 몇 년째 아이를 못 낳아 병원비를 수 천만 원 쓴다는 사람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국가적 저출산 방지 및 출산 장려정책에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제도적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한 그런 사람.

1년 간 시험관 시술만 4회를 거치는 동안, 건강했던 몸은 피폐해졌다. 밝은 마음은 병들었다.

호르몬제는 사람을 웃기보다는 울게 만들었고, 체중은 뜻하지 않게 불었다.

계속된 실패에 가계 경제에도 적신호가 오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기를 불렀다.

첫 시도에 실패한 뒤 남편이 싱가포르로 발령을 받았다.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다시 말해 인사이동 때 반영할 수 있도록 하고자 미리 알렸다. 패착이었다. 솔직할 필요가 없었던 영리 조직에 내 밑천을 드러냈다.

남편의 외국 근무와 아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와 별개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근무를 이어갈 수 없었기에 휴직을 요청했다. 시험관 시술에 실패한다 쳐도, 남편이 있어야 임신을 할 것 아닌가.

우선은 남편의 근무기간 2년을 부탁했다. 사측에서는 우선 1년, 그리고 1년을 연장해주겠노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믿었다.

그러나 1년 동안 시험관 시술은 모조리 실패했고, 시험관이 아니면 아이를 사실상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4차례의 실패에도 끈을 놓을 수 없게 한 것은 시술 경과가 호전됐다는 데 대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휴직 기간 1년이 채 되지 않아, 정확히는 두 달을 앞두고 회사를 찾았다. 인사차 한 방문이었다.

많은 동료 선후배가 언제 복직하는지를 물었지만 답할 수 없었다.

내 신뢰는 1년 연장에 있었지만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중에도

내가 소속된 A국장은 "법과 규정에 정하는 바가 있으면 연장 신청을 하라"고 했고

업무를 지원하는 B국장은 "(시험관을/아이 낳는 걸) 포기해"라면서 "네가 멋대로 회사를 다닌다며 금수저라는 소문이 있다. 이런 이상 A국장이 막지 못할 것이다"라며 복직과 퇴사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했다.

자려고 누워있다가도 울분이 치밀었다.

나도 아프다. 몸도 마음도 아프다. 돈도 잃고, 자신감도 잃고, 아이도 없을까 봐 겁나는데, 첫정을 준 회사는 내게 '포기'를 말하고 선택을 종용한다. 갈림길은 있지만 외나무다리와 같은 곳에서.

표면상 두 결재권자는 휴직 연장을 불허하는 결정을 내린 듯 하지만, 휴직 연장 불허는 자진퇴사를 하거나, 할 수 없는 복직을 종용하는 것을 의미하니 공을 내게 넘기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회사는 근로의 기회를 충분히 주었음에도 사원이 퇴직을 희망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풀릴 것을 기대하고 있을 테다. 며칠 뒤 알았던 사정에 비추어 보면, 청년고용을 대가로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받아온 회사는 이런 식으로 찜찜하게 사람을 내보낼 경우 그 지원금을 토해내야 하기에, 불이익을 피하는 방법까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 직장과 아이를 선택하라면, 내 선택은 아이다. 어떤 직장이든 나중에 기회가 있을 수 있지만, 나이를 더 먹고, 시술이 불가능해지면 아이는 낳을 수가 없으니.  

며칠 뒤, 다시 인사를 하러 회사에 갔다.

이놈의 인사성이란.

나는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직후 남편을 데리고 (처가에 가듯) 회사 전체를 돌며 인사를 시켰고, 휴직 중에도 한국에 들를 때마다 말도 없이 들렀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매번 회사에 갔다. 혹자는 그런 나를 보면 정말 놀러 다니는 줄 알았을 테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러 간 회사에서 내 입장에 가까이 서 줄 수 있는 두 선배를 더 만났다. 병가처리를 고민해보자는 C이사와 기존에 적용받은 휴직 규정(사규)이 이미 2년짜리니 인사위원회에서 잘 처리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본다는 D노조위원장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목과 같다.

처음 인사를 하러 간지 10일 만에, 휴직 만료를 45일이나 앞두고, 휴직 연장 불허 결정이 내려졌다.


나는 이제 8년째 적을 두었던 회사를 떠난다.

꼭 내가 떠나려던 것도 아니고, 회사도 나를 내보내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결론은 퇴사 준비생이다.

인생 2막을 준비하면서, 1막을 되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번 일에서 도움을 주려 애쓰고, 평소 참 좋아했던 E담당부장으로부터 오늘 '그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J 씨...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하게 됐어요. 오늘 회사에서 J 씨 휴직 연장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답니다. 오늘 오전에 결론 냈고, J 씨한테 연락하라고 나한테 통보하네요. 다음 달이 만기인데, 예상보다 일찍 결정해버리네요"

만 7년, 그렇게 정을 주었지만, 매몰차게 사라졌다.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나는 한 통의 카톡으로 실업자가 된다.

건강보험 직장가입, 실업급여 신청, 휴직 중 근로 보상 등 과제가 던져졌고,

전화만 하면, 명함만 주면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은 나를 모른 척할 것이고,

연로한 부모님과 가족을 비롯해 집안 경조사가 생겨도 내 손님은 없게 됐고,

내 이름으로 받을 수 있던 대출, 카드 발급에 제동이 걸렸다.

일련의 일들에 가담했던 남편은 졸지에 외벌이 외노자가 됐다. (물론 곧 한국에 가면 더 적막한 현실이 기다리겠지)

올해가 삼재라고 엄마가 어느 스님께 가서 삼재풀이를 하고 부적을 줬는데, 아무래도 나는 이 삼재를 이렇게 시작하나 보다.

곧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과 해결해야 한다는 귀찮음이 동시에 떠밀려 오지만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는 건 기록밖에 없기에

오늘 나도 드디어 한 끼의 브런치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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