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가 나를 간파했다고 느낀 몇 번의 순간엔 이런 대화도 있었다.
“넌 완벽하게 할 수 없으면 그냥 안 하고 싶어. 그지?”
“오. 쉬발. 그런가 봐.”
“ㅋㅋㅋㅋㅋㅋ”
“아냐. 정말 그래. 큰일이야.”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야지만 내가 나라는 사실을 실감하듯, 다정이가 나를 저리 설명했기에 나는 내가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졌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확신.
순자가 주변에 나를 묘사할 때, 얘는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엄마 입장에선 승부욕이 좀 있었으면 한다고 얘기할 때마다 조금씩 건드려지던 불편한 감정이 실은 정말 불편했던 거란 걸. 나는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거니까요.
올해 초, 삼 주간의 글쓰기 워크숍을 끝으로 온라인으로나마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칭찬을 들었다. 자기복제에 관한 글쓰기 고민에서 시작된 거였는데, 질문자가 나를 포털에 검색했을 때 누군가 나와 내 글을 두고 자기복제가 없는 사람(혹은 그런 글)이라 말했다는 거였다.
질문자는 작가의 자기복제에 관한 내 생각을 물었고 나는 답했다. 어려운 질문을 주셨는데, 실은 제일 단순한 문제 같다고. 자기복제는 당연하며(별수 없거나 피할 수 없기에) 그것을 충분히 경계하는 것으로 쓰는 사람의 의무를 다하면 되지 않겠냐고.
거만하다면 거만하게 느껴질 대답이었으나 머리를 굴려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 대신 사력을 다해 경계해야 한다고 말을 덧붙였다.
노트북을 닫고 침대에 눕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하고 그래서 미안한 기분. 내가 나의 자기복제를 너무 잘 알아서였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숨겨졌나. 언제까지 숨길 수 있나. 숨기는 건 거짓말이 아닌가.
가난과 자기연민, 담담한 척과 솔직한 척 그리고 나의 순자씨. 그것들은 내가 글을 쓰며 아쉬울 때마다 찾는 장치들이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도록 시간을 단축해주는. 기껏 쓴 글을 도로 지웠던 건 죄 이런 이유에서였다. 크게 고민하지 않아서. 그게 괴롭기보단 창피하기만 해서.
친구와 망할 글쓰기에 관해 토론하다 저자가 게으르면 독자도 게으를 수밖에 없다고 맞장구치던 순간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며 누구보다 고개를 끄덕였는데. 절대 게으른 글은 쓰지 말자며 다짐했는데.
그런 글이 싫어서 아무것도 적지 않은 지 꽤 됐다. 더 정확히는 벌써 그런 내가 싫어서였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글쓰기와 멀어지고 있단 생각이 들었고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때부터 내내 날 따라다녔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점점 줄어들 거여서. 나는 겨우 나일 거니까.
잔잔한 물결일수록 더 그 시작과 끝을 알기 어렵듯, 이제 와 충분함과 완벽함을 구분하려니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나를 탐구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일처럼 느껴져 더욱 그렇다. 충분히 사랑하거나 충분히 칭찬하는 일, 충분히 매달리거나 충분히 포기하는 일도 그냥 안 하고 싶다.
내가 충분히 게으르다는 창피함만이 완벽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