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부작述而不作"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논어》 <술이>
“옛것을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創作) 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것을 나는 가만히 우리 상(商) 나라의 어진 대부(大夫)인 노팽(老彭)에게 견주노라.” 《논어집주》 <술이>
주희의 해석은 공자는 창작하지 않고, 선인들의 가르침을 전달했다고만 한다. 전달만 함으로, 선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세워준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논어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런 해석은 어색하다. 오히려 "옛것을 전술하지만 않고, 창작하며"로 해석해야 《논어》의 전체 흐름에 부합하지 않을까.
공자는 《논어》에서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명시한 적이 없다. 간접적으로 사례에 맞게 설명할 뿐이다. 구체적 사례들을 들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이는 공자의 사상이 가지는 실천성이다. 그래서 설명할 때마다의 내용도 다르다. 상당히 유연하게 가르친다.
공자의 가르침이 유연하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제자들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창조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선인들의 가르침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반면, 가르침에서도 창조 없이 가르친다면, 단순한 전달자뿐이다. 그런 단순 정보 전달자로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주희의 해석은 오히려 자신의 학술적 경지에 토 달지 말라는 경고로 들린다. 그리고 실제 조선에서는 주희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폐쇄적인 형이상학 논쟁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창작創作하지 않고 전달만 했다.
결국 창작創作하느냐 못하느냐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능동적인 자세와 태도로 배움을 하는가에 달려있다. 이것이 내 것이면, 애정이 생긴다. 그런 애정을 가진 어떤 것을 진정성이라고 부른다. 그 진정성이 결국 자신이 콘텐츠의 질을 결정한다. 이런 과정이 창작創作, 창조이다.
그러나 이 것이 내 것이 아닐 때, 아무런 애정도, 진심도 생기지 않는다. 진정성이 결여된 그 어떤 무엇도 대중들에게 감흥을 줄 수 없다. 결국 단순한 메아리를 기계적으로 외치다가, 책임을 회피할 핑계가 된다. 내가 한 게 아냐..
이럴 때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모두 비참해진다. 누구도 주체가 아닌,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가르침에 대한 말씀이지만, 현대사회에서 가르침은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여러 조직들에서, 리더와 중간관리자, 심지어 말단의 직원들까지, 술述할 것인지 창작創作 할 것인지 그 기로에 서있다.
앞으로 술述의 영역은 AI로 대체된다고 하니, 창작創作 하지 않고서는 사람 구실 하기도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