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기남은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뉴욕에 도착한 기남은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친구를 통해 미국 유명 프로듀서를 소개받았다.
그가 기획한 남성 5인조 그룹 ‘화이트 스웨그즈’의 내한 공연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모리스 파라다이스라고 소개했다.
“처음 이 그룹이 데뷔할 때만 해도 백인 미소년밴드가 전무하던 터라 결과가 처참했죠.”
“지금의 인기론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하하하! 우리도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농담하곤 합니다. 믿을 수 있어? 하면서요.”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역시 내가 예상했던 게 옳았다는 게 증명됐죠.”
“...”
“당시 10대 여자아이들이 즐길만한 문화 콘텐츠가 거의 없었거든요. 걔들이 락이나 펑크, 혹은 디스코 이런 거에 별 관심이 없거든요.”
“그렇군요.”
기남이 동감을 표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다고 힙합이나 랩뮤직으로 가기엔 아직 좀 덜 여물었고요. 그러다 잘생긴 외모에 부드러운 이지 리스닝이나 가벼운 댄스곡을 부르는 아이돌이 탄생했으니 환장할 수밖에요! 하하하!”
그는 표현에도 전혀 막힘이 없는 호탕한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기남은 그와 그 밖의 관계자를 만나 공연 일정과 조건 등 사업을 조율한 다음 서둘러 귀국했다.
사실 기남이 미국 보이밴드 내한 공연 문제로 출국을 앞둔 시점에 회사 내에선 여러 의견들이 오갔었다.
우선 많은 외화를 들여 굳이 그들을 초청하는 게 옳은 것이냐에서부터 수익성 면에서도 설왕설래가 오갔다.
그때 기남은 자기 의견을 이렇게 피력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먼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늘 한국 가수들만 참고해선 발전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수익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남은 주변을 둘러보며 부드럽되 카리스마 넘치게 말을 이어갔다.
“세상은 이제 무섭도록 빠르게 변화해 나갈 겁니다. 일반인들과 똑같이 발을 맞춰 나가선 절대 선두주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선두주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사업 특성상 하는 말입니다.”
기남은 실제로 고작 몇 년 더 산 것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다는 걸 똑똑히 목도했었기에 이런 미래 지향적인 혜안이 가능했다.
해서 그는 자기의 의지대로 밀어 붙었다.
***
회사에 도착해 보니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 올댓보이즈가 지금 인기를 휩쓸고 있습니다!”
보컬 트레이너 이준호 부장이 흥분하며 외쳤다.
옆에 있던 춤 담당 홍경진 차장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춤, 노래 다 우리 애들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 일색입니다, 대표님! 선풍적인 아이돌 등장이라면서요!”
“좋은 소식이군요. 하지만 좀 더 지켜보죠.”
기남은 회사로 들어오면서 뭔가 찜찜한 기운을 느꼈다.
그 정체가 뭔지 계속 그게 맘에 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재무 담당 유진현 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안 계시는 동안 최준혁 부장이 며칠 회사를 안 나오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사람이 며칠째 회사를 안 나오고 있다고요?”
기남은 순간 자신이 불안했던 이유를 알 거 같았다.
그동안 자신의 의견에 주로 반대부터 해오던 최준혁을 기남은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는 탓으로 치부했었다.
게다가 최준혁은 일은 열심이었지만 성격 자체가 소심한 편이고 자기처럼 워낙 말수도 적었기에 자신이 그와 말을 섞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었다는 걸 떠올렸다.
“호출해 봤나요?”
“네. 전혀 응답이 없습니다.”
“그럼, 집이라도 찾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
“회사 공금이 좀 빕니다.”
“그 일이 최준혁 부장과 연관이 있단 말씀이신가요?”
“아무래도 회사 안 나오는 타이밍도 그렇고...”
기남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유진현은 목례를 하곤 바로 자리를 떴다.
기남은 몇 년 전 회사를 창업했던 그때를 회상했다.
사실 최준혁은 본인이 원해 회사에 자진 입사한 케이스였다.
이준호나 정찬, 홍경진 같은 경우는 이미 그쪽에서 일하던 인지도 높은 사람들이었고 기남이 직접 만나 섭외해 영입한 경우였지만, 최준혁만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증명하며 함께 일하게 됐었다.
워낙 의욕이 넘쳤고 똑 부러져 보여 레퍼런스 같은 게 없어도 기남이 나서서 채용했고 지금까진 어떤 초창기 멤버보다 성실하게 일해왔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기남이 혼잣말을 했다.
‘무슨 일인지 대화로 해결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기남이 이런저런 일을 보는 중 외출했던 유진현 차장이 돌아와 기남 방으로 들어왔다.
“집도 이미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이를 통해 들은 말이 있는데 꽤 얼마 전부터 최준혁 부장이 이런 소릴 하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
“애가 아파서 한국에선 치료가 불가능하니 이민이라도 가야 할 거 같다고요.”
“이민이요?”
“네! 그 집 큰 아이가 선천성 심장병이 있다는 얘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얘길 진작 왜 나한테는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기남에게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자기가 내한 공연 건으로 미국 출장을 결정한 며칠 뒤 최준혁이 자기 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말을 할 듯 안 할 듯 한참 주변을 서성거리다 바빴던 기남이 그를 쳐다보자 이렇게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었다.
“대표님 바쁘신데, 됐습니다! 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기남도 워낙 해야 할 일이 많아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번 결근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남은 유진현 차장에게 부탁했다.
“아는 분들 통해서 최준혁 부장을 꼭 찾아주세요! 그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자기가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기 전 자길 찾은 이유는 딸과 관련된 게 분명해 보였다.
미국에 지인이 많은 걸 알고 자기에게 딸 병에 대해 뭔가 부탁하고 싶었던 걸 거라고 기남은 짐작했다.
최준혁에 대한 수소문에 집중하던 어느 날 그를 봤다는 지인의 말에 기남은 그가 있다는 현장으로 떠났다.
역시 병원이었다.
***
저 멀리 최준혁이 보였다.
기남은 그의 곁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기남을 발견한 최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 체념한 듯 기남에게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떻게...”
“큰 아이가 많이 심각한 상황입니까?”
기남이 돈 때문에 자길 찾아왔다고 생각했던 최준혁이 미안한 표정이 돼 거의 울 듯 말을 이었다.
“돈은 반드시 꼭 다시 채워 넣겠습니다. 대표님이 안 계시고 너무 급해 공금에 함부로 손댄 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궁금한 건 돈의 행방 뭐 그런 게 아닙니다. 아이 상태가 어떠냐고요?”
“...”
“미국 출장 전에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했다면 제가 직접 병원을 알아볼 수도 있고, 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워낙 대표님께서 바빠 보이시고 중차대한 일로 출장 전이셔서요.”
여전히 미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최준혁이 말을 이었다.
기남이 긴 한숨을 내쉬자, 최준혁이 다시 한번 다짐의 말을 전했다.
“대표님! 절 믿어주시고 제게 중책을 주셨는데 실망하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돈이라는 건 가치 있게 쓸 때 가장 효용성이 높죠. 아이를 위해 쓰셨다면 거기에 해당할 테고요.”
“아무리 그래도 공금에 손을 댄 건”
“됐습니다. 돈 얘긴 그쯤하고 아이 상태부터 얘기해 보세요. 어떤 상황인 건지.”
기남은 최준혁을 만나고 돌아와 당장 미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 결과 동창 중 한 명이자 유력한 집안 출신인 마이크를 통해 그의 가족 중 유명한 심장전문의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기남은 마이크 덕에 며칠에 걸쳐 의사와 전화로 수술에 관해 상의한 후 수술 날짜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준혁은 기어이 기남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뭘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출국 준비하세요. 아이 상태가 심각하니 제가 비행기 등 제반 사항에 관해선 알아서 처리해 놓겠습니다.”
기남은 친구 정완수에게 부탁해 그와 가까운 항공회사 CEO를 통해 퍼스트 클래스를 특별히 준비시킬 수 있었다.
그 안에 침구를 갖추게 하고 최준혁과 아내, 그리고 아픈 아이가 편하게 뉴욕까지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정완수가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전화로 기남에게 알리며 말했다.
“대단하다, 남기남! 회사 직원을 위해, 아니지! 직원도 아니고 직원 가족을 위해 친구에게 이런 부탁을 하다니!”
“고맙다 완수야! 이 은혜 꼭 갚는다!”
“이미 은혜는 다 갚은 걸 뭘! 너 덕에 우리 회사 요즘 잘 나가는 거 너도 알잖아! 니 덕분에 내 입지가 완전 돌덩이가 됐다! 흐흐.”
“그렇다면 다행이고! 암튼 고맙고 한 번 얼굴 보자!”
그렇게 최준혁은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뉴욕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