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화장실 갔던 최준혁이 돌아왔고 셋은 곧 회의를 시작했다.
“정 부장! 내가 이번 신곡 들어봤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곡이 있더라고.”
최준혁의 말에 정찬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곧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거? 이번에 내가 아는 동생한테 부탁해서 받은 곡인데 리듬이 좀 익숙하긴 하지만 좋기만 하던데. 안 그래, 이 부장?”
정찬이 이준호에게 넌지시 동의를 구하자 사람 좋은 이준호가 버벅거렸다.
“어? 난 아직 들어보진 않았는데... 워낙 정 부장이 잘하니까 뭐...”
최준혁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회사가 지금 위긴데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면 안 되지! 안 그래?”
정찬이 불쾌한 표정을 눈에 띄게 드러내며 외쳤다.
“뭐? 네가 뭔데 그딴 소릴 해? 너나 똑바로 해!”
“똑바로 하라? 어, 그러고 보니 대표님께 말씀 안 드리고 회사 공금 쓴 걸 말하나 본데”
“그래! 공금에나 손대는 주제에 누구한테 훈계야!”
최준혁이 고개를 숙이고 화를 삭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이준호가 나섰다.
“아이 왜들 이래! 대표님께서 우리끼리 더 결집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 잊었어! 자자! 이러지들 말고”
“야! 이 부장! 너도 줄 잘 서! 이 새끼 대표님이 좀 잘해 준다고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최준혁이 눈에 불을 켜며 그를 노려봤다.
“정찬! 너 말조심해라! 난 네가 말한 그 일 말곤 회사 일에 소홀한 적 없고, 그걸 대표님이 알아봐 주신 거뿐이니까.”
“내가 정말 더러워서! 혹시 모르지! 너도 지우처럼 대표님과 뭐라도 되는데 말씀을 안 하는 건지도.”
정찬이 이성을 잃고 할 말 안 할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기 시작했다.
“아님, 뒷구멍으로 대표님 약점이라도 잡고 있는 건지 또 아님”
“야! 정찬 너 정말 말 좀 가려서 해라!”
이준호가 자제시키려 해도 정찬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특급열차라도 된 양 마구 뱉어냈다.
“이해가 안 가! 회사 공금에 손대는 놈을 뭐가 이쁘다고 대표님은 계속 싸고도는 거야, 대체! 우리처럼 착실한 사람들 소외감 느끼게 말이야!”
그때 작곡가 송범철이 등장해 잠시 잠잠해졌다.
그는 얼마 전 과장에서 차장으로 직급이 한 단계 올라 간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화가 많이 난 듯한 표정의 송범철 차장이 정찬에게 다가와 말했다.
“정 부장님! 저랑 잠깐 말씀 좀 나누죠!”
“무슨... 일인데?”
정찬이 난처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송범철은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 말씀드려도 돼요, 정말?”
그래도 정찬이 반응을 안 하자 송범철은 차갑게 내뱉었다.
“제가 정 부장님께 드린 곡이 왜 저쪽에 가 있는 거죠?”
“저쪽? 어디?”
이준호가 의아한 듯 입을 떼자 그제야 정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송범철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뭔 소리야? 자! 나가서 얘기하자! 자, 어서!”
정찬이 급히 송범철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은 이준호와 최준혁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다 최준혁의 눈빛이 의심을 가득 담은 것으로 변했다.
***
정찬을 뺀 다섯 명의 회사 간부와 기남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니까 지금 정 부장님이 어떤 상황을 만든 건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기남이 요구하자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준호 부장이 입을 뗐다.
“그게... 일단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부장이 힘겹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첫째는 송범철 차장이 작곡한 곡을 라이벌인 금화 쪽에 넘겨줬다는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다시 한번 기남을 비롯해 주변을 둘러보다 이 부장이 말을 이었다.
“둘째는 이번에 발표할 올댓보이즈 앨범에 표절 의심 가는 곡이 몇 개 포함돼 있습니다.”
“표절이라고요? 확실한가요?”
“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들어봤고 또 지우를 비롯해 직접 곡 만드는 가수들에게도 들려줬는데 다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틀림없는 표절이라는.”
기남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우려했던 일이 결국 벌어졌군요.”
“우려하셨었다고요? 어떻게...”
이렇게 질문을 던진 이는 윤진현 차장이었다.
“제가 당부했었죠. 우린 단순히 인기 있는 가수를 배출하는 것에 만족할 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실현화해야 한다고요.”
“네. 늘 강조하셨죠.”
최준혁 부장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제가 우려했던 게 바로 반짝 인기를 위해 마구잡이로 짜깁기하거나 다른 곡을 표절하는 거였습니다.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걸 지난번 회의에서 송 차장님도 언급하셨고요.”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저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남이 말을 이어갔다.
“표절이 의심되면 아무리 인기 아티스트라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가수의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겠죠. 한 마디로 가수는 아무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피해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가수를 발굴해 육성한 우리 같은 회사 역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됩니다.”
다소 격하게 말을 잇던 기남이 잠시 쉬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표절은 당연히 근절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엄하게 처벌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저작권협회라는 걸 갖곤 있지만, 아직까진 국제저작권협회에 정식 등록하지 못했죠. 우선 국제협회에 정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그것부터 애써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야 저작권에 대한 개념을 더 확실하게 여길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을까요, 대표님?”
이렇게 말한 이는 역시 최준혁 부장이었다.
어려울 때 가장 적절하고 핵심을 찌르는 쾌도난마 역할의 대가다웠다.
“급한 불 당연히 꺼야죠. 올댓보이즈 앨범은 처음부터 다시 제작하는 걸로 합시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표님!”
재무 담당 윤진현 차장이었다.
기남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발표날을 지연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레코드사와 계약 건도 그렇고 방송 스케줄, 화보 촬영 모든 게 다 줄줄이 연결돼 있는데...”
“그래도 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만약 표절한 곡이 운 좋게 넘어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다음에도 표절은 또 이어질 거고, 그러다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될 겁니다.”
기남은 회사 위기 때마다 정면승부를 내세웠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정도(正道)를 따라 행동할 것을 다짐했다.
“전 좋은 선례를 남기는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꼼수로 성장한들 그건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올바른 방식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우리 회사를 통해 보여줄 거고 우린 대중 입맛에 맞춰 딴따라를 토해내는 그런 기획사가 아닌, 진정 대한민국 대표 아티스트를 배출하는 회사가 될 겁니다. 그 과정에 여러분 모두가 동참하시는 겁니다!”
기남의 일장 연설을 듣던 네 명이 순간 박수를 쳤다.
그리고 한 명씩 돌아가며 감동을 표현했다.
“제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해 왔단 걸 대표님 말씀 듣고 보니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준호 부장이었다.
“전 그냥 대중이 좋아하는 곡 많이 만들고 그걸 소화할 수 있는 가수 육성하는 게 다인 줄 알았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대표님! 이렇게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긴 처음입니다.”
작곡가 송범철 차장이 거들었다.
“처음부터 다시 하려면 시간도 걸리고 힘이야 들겠지만, 대표님 말씀 듣고 보니 사명감이 느껴집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윤진현 차장 역시 동감을 표했다.
춤을 담당하는 홍경진 차장이 쑥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저 같은 춤꾼은 어려서부터 별다른 생각 없이 춤만 춰와서 이런 말씀드리기 좀 뭣하지만 춤과 노래가 국위를 선양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대표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요.”
다들 얼마간의 흥분을 동반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최준혁 부장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듣고 앉아 있었다.
기남이 그를 바라봤다.
“최 부장님은 이번에도 다른 의견이신가 봅니다. 어떤 견해이신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최준혁 부장이 기남을 향해 마침내 입을 뗐다.
“대표님의 진정성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기업 마인드 가지신 걸 존경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회사가 성장하려면 순수한 정신만으론 역부족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최 부장님은 대안이 있으신가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 말고요.”
기남은 대표긴 하지만 자기보다 연배가 꽤 많이 높은 최 부장과 이 부장 외에도 회사 직원 모두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썼다.
그런 이유로 간부를 비롯해 직원들은 그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느끼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최 부장만이 대표에게 직언하고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최부장은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당장 며칠 후면 방송도 잡혀 있고 촬영도 해야 합니다. 앨범 발표를 늦춘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해서 제가 생각한 건 레코드사와 조율해서 곡을 축소하는 겁니다.”
“표절곡만 빼자 이 말씀인가요?”
“네. 표절 의심 가는 곡이 지금 세 곡인데 그걸 다 빼면 문제없을 겁니다. 대신 회사가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분명 존재하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단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남이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역시 별명대로 쾌도난마 해결책을 내놓으셨군요. 전 말씀대로 순수하게 회사 경영하는 것만 생각했지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의견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날 사람들은 기남을 다시 보게 됐다.
직원들과 거리감을 두고 차갑고 냉철한 사람으로만 여겼던 대표가 사실은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최 부장 역시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걸 모두가 깨닫게 됐다.
표절 사고란 위기로 인해 회사 식구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결집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