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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빌런 2

위기 상황을 만든 커크가 마무리 짓기를 바란 거죠.


지난달부터 ‘똘똘한 임차인 모여라’ 카페를 하루 종일 들락거리며 사무실 자리를 찾아봤지만, 보증금 500만 원에 월 35만 원짜리 사무실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하긴 손바닥만 한 고시원도 한 달에 30만 원이 넘는데 35만 원짜리 사무실을 찾는 나도 양심이 없지.      


지금 사는 아파트를 분양받은 건 3년 전이었다. 브랜드 건설사가 지은 초품아라 분양가는 예상보다 훨씬 높았고 남편은 청약을 넣는 전날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우리 수준에는 무리라며 다음에 분양하는 아파트를 기다리자고 했다.


남편은 자기 분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허세는커녕 욕망을 드러내는 건 부끄럽다며 얼굴이 붉어지는 남편이 좋았던 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재테크 삼아 종잣돈을 만들고 집 평수를 늘리고, 새 집에 맞춰 살림살이를 바꾸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촌스러워진 살림살이도, 이제는 가끔이 아니라 늘 붉은 남편의 얼굴도 지겨워졌다. 때때론 한 발자국 차이가 열 발자국이 아니라 백발 자국이 되어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지겨운 것을 넘어 남편의 성실함이 무능해 보일 지경이었다.

빚도 자산이래,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는 말 몰라?라고 정색하면 남편은  '다들 빚 좇아 뛰어가라 그래. 난 그냥 하루라도 편히 쉴란다.' 로 대화의 벽을 쳤다.  

남편을 구슬리기 위해 했던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다. 오늘 뛰지 않으면 내일이 오기도 전에 낙오한다는 게 맞는 진짜였다.

몇 달 내내 내 등쌀에 못 이긴 남편은 원천시 사는 사람들은 개나 고동이나 다 넣고 본다는 초품아 분양에 1순위 자격으로 청약 접수를 했고 일주일 후 우리는 아파트 투유 홈페이지 ‘청약 당첨자 조회’ 창에서 “당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는 내 결정력 덕분이라 했고 남편은 자신이 지금까지 아껴 둔 청약통장 덕분이라고 했다.
누구 덕분이든 상관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선택과 결정을 칭찬했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나는 평일엔 커뮤니티 센터에 있는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주말엔 남편과 민서와 함께 멋진 조경으로 꾸며진 공원을 산책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대출금과 이자가 버거울 때마다, 남편이 휴직과 이직을 두고 어떤 게 경제적으로 덜 타격이 작을지 고민할 때마다 이 멋진 조경도, 화려한 피트니스 센터 모두 내 대출금으로 만든 보기만 좋은 허세였구나, 라는 걸 알았다.

남편은 내가 쪼들리는 생활비를 운운하며 한숨을 쉬면,

“고생스럽긴 해도 당신이 같이 벌었을 때가 좋았는데.”

라고 말하고는 냉장고에서 소주와 마른안주를 꺼내왔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고 얼추 정리만 되면 바로 일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면 대출금과 이자를 갚는데 보탤 수 있을 거라고, 아니 그렇게 하고 말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나였지만, 이사하고 2년이 지나도록  나는 제대로 된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임시직이나 누구의 대타가 최선이었고 돌아오는 건 '다음에 부탁할 일 생기면 또 연락드려도 되죠?'와 같은 보험성 부탁이나 '쉬셨다더니 생각보다 일 잘하시네요.'와 같은 칭찬이었다. 그나마 그런 부탁이라도 없는 날이 길어지면 종종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습이라도 보는 날엔 남편은 그냥 되는대로 살자, 로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매달 돌아오는  대출금과 이자 납부일은 나와 남편을 뛰지 않으면 낙오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무리해서 받은 아파트 대출금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했다. 소득에 관여했고 소비에 참견했다. 고작 이 정도 벌어서는 평생 빚만 갚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기분 내고 싶은 날에도,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다가도, 돈 달라고 툭하면 징징대는 차를 버리고 새 차로 바꾸고 싶다가도 대출금 압박에 설레는 마음을 치워버렸다.

대출금은 만질 수도, 볼 수 없는, 그래서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오로지 은행 통장에 찍힌 숫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 어떤 것보다 우리 가족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가장 강력한 빅브라더였다.


남편은 자신의 명의로 된 카드 하나만 남기고 모든 카드를 잘라버리자고 했다. 아무래도 카드가 여러 개 있으면 그만큼 돈 쓰는 게 쉬워지고 헤퍼질 테니 새는 돈을 막자는 뜻이었다. 카드 사용 알림 문자는 남편 핸드폰 번호로 신청했다. 소비 창구를 하나로 합쳐야 새는 돈을 막을 수 있다는 남편은 새는 돈의 주범은 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출금이 나와 남편을 감시하는 빅브라더였다면 카드 사용 알림 문자는 나를 감시하는 빅브라더였다.


평소에는 할 말이 없으면 서로 연락을 하지 않지만, 결제 금액이 십만 원이 넘어갈 때면 카톡을 보내곤 했다. 오늘도 역시나 ‘삼성카드0*9* 승인 129,000원 아디다스’ 알림 문자가 도착했는지 결제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카톡이 왔다.      


세대주: 어디 갔나 봐?

어, 민서 패딩 하나 사러. 애가 또 컸는지 작년에 입던 패딩이 작네.

세대주: 당신 것도 하나 사지.

돈이 어딨냐. 나라도 아껴야지 ㅋ

세대주: 맨날 그 소리는. ㅎㅎ

남들처럼 출근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옷이 뭐 필요해.

세대주: 그건 그렇지. 오늘 저녁은 뭐? 구내식당 진짜 별로.

아! 맞다 나 오늘 저녁에 오늘 타요모임 있어. 냉장고에 찌개랑 반찬 넣어놨으니까 민서랑 먹어. ♡   


뭘 샀길래 십만 원이나 썼냐고 바로 물어보면 될 것을 혹시나 내가 기분 상해할까 봐 남편은 늘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질문해도 기분이 나쁜 건 숨길 수 없다. 기분 상하게 할 의도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어디 갔냐고 묻지를 말든가, 애초에 마음에도 없는 ‘당신 것도 하나 사지’라는 말을 하지 말든가. 누구 약 올리나,라고 짜증이 날 때쯤 다시 카톡이 왔다.      


세대주: 알았어. 아 참, 사무실은 어떻게 됐어?

35만 원 밑으로는 없대.

세대주: 나도 35만 원 위로는 안 돼. 그냥 집에서 놀아. 누가 너보고 돈 벌어 오래. 안 쓰는 게 돈 버는 거야.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카드 사용 알림 문자나 내 핸드폰으로 바꾸고 그런 말을 해라. 눈치 보여서 쓰겠어?

세대주: 내가 언제 눈치 줬다 그래.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냐?

말이 나와서 그런데 말끝마다 집에서 놀라고 하는데… 내가 집에서 노는 거 봤니?    

  

내가 보낸 마지막 카톡 메시지 옆에 붙은 1은 금방 사라졌지만 남편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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