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을 알아보느라 부동산을 몇 군데 더 돌아다녔더니 약속한 시각보다 늦었다. 급하게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리와 순정이만 먼저 와 있고 아직 진희언니는 도착하지 않았다.
“진희 언니는? 아직 안 왔어?”
목소리를 듣고서 그제야 내가 온 줄 안 유리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며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제 왔어요?"
"너 할부 개월 수 고민할 때 왔지."
"크크크. 고새 봤어요? 아 진짜...6개월은 부담되고 12개월은 노예고. 이놈의 할부 고민은 언제 끝날까요."
"죽어야 끝나지. 그나저나 언니는 웬일로 늦는데?"
"아. 겸이 아버님이 사고를 쳐서 그거 해결하러 가신다고 좀 늦는다고 연락 왔어요”
“사고? 무슨 사고?”
순정이와 유리는 이미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했더니 피곤하다는 표정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유리가 입을 열었다.
“겸이 아빠가 당근마켓에서 중고 자전거 샀다가 들켰대요. 언니 몰래 지하 주차장에다 숨기다 걸려서 어제 그 집 난리 났어요.”
새 자전거도 아니고 중고 자전거 하나 사서 타겠다는데, 그 거 하나도 못 봐주고 남편 잡는 마누라라니, 나도 모르게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니도 참 어지간하다. 뭐 그런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그런대. 근데 뭘 해결하러 가?”
“당장 자전거 돌려주고 환불받아 오라고요. 안 그럼 언니가 직접 가서 돈 받아 올 거라고. 어딘지 다 아니까."
순정이 거들었다.
"풉, 진희언니가 남편 핸드폰에 위치추적 앱 깔아놨잖아요.”
"뭐? 애인도 아니고 부부 사이에 왠 위치추적앱? 얼마나 사랑하면 그렇게 되나?”
순정이는 '이 언니 진짜 남일에 관심 없네'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몰라요? 작년인가 겸이 아빠가 진희언니 몰래 신용 대출받으려고 은행 갔다가 문 앞에서 잡혀 온 거?”
12개월 부분 무이자와 6개월 무이자를 고민하다 결국 6개월 무이자를 선택하고 결제를 끝낸 유리가 본격적으로 끼어들었다.
“도대체 그 집은 왜 그런대? 아빠는 사고 치고 엄마는 해결사야? 완전 웃겨, 크크.”
“그래도 남편 체면이 있지 어떻게 은행 앞에서 남편을 끌고 나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유리와 순정은 상대방의 멱살을 서로 잡으며 진희언니가 남편을 어떻게 끌고 왔을지 상상이 된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아니면 요렇게?’ 하며 깔깔댔다.
슬슬 진희언니의 사생활이 오늘의 주제가 되는 것 같다고 느낀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가만 보면 언니도 성격 참 희한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까.”
“언니는 자기가 모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남편이든 애들이든 다 자기가 컨트롤해야 속이 후련한 성격인데 오죽하겠어요.”
“오늘도 자전거 돌려주고 돈 안 받아오면 석 달 동안 달 용돈 없다고 했대요. 그래도 못 믿겠는지 기어이 같이 갔다 오겠고 하더라고요. 자기 눈앞에서 돈 돌려받는 걸 확인해야 한다고.”
“진희언니도 참, 별나. 그치?”
나는 유리와 순정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내 말에 유리와 순정이 동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나의 기대와 달리 유리와 순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얘네들 뭐야....?' 라고 생각하는 찰나 진희언니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미안, 늦었어. 남편 집에 데려다주고 오느라 안 그래도 늦었는데 더 늦었네.”
진희언니는 목이 타는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우리 셋은 진희언니보다 당근마켓 이후 이야기를 기다렸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하지만 언니가 컵을 내려놓는 순간 참을성 없는 유리가 침묵을 깼다. 정말로 따라갔는지, 환불받았는지, 그리고 그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잘 해결됐어요? 진짜 쫓아갔다 온 거예요?”
“자존심 상해할까 봐 멀리서 지켜봤지. 자전거 주고 돈 받고 통장에 넣는 것까지 확인했어.”
겸이 아빠가 풀이 죽어 있을 것 생각하니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자전거가 얼마길래 가서 받아오라고 했어요? 얼마 안 하는 거면 그냥 타게 두시지.”
진희 언니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35만 원. 아무리 계산해도 돈 나올 구멍이 없는게 뻔해서 그 돈 어서 생겼냐고 물으니까 그동안 회식 술값 안 내고 돈 모았대. 기가 막혀서. 사람들이 남편 회식비도 안 주는 마누라라고 내 욕을 얼마나 하겠어. 멀쩡한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 데 선수야.”
언니의 표정엔 억울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나랑 상의도 없이 무슨 취미고, 자전거냐고. 나는 그게 제일 괘씸해. 생각 없이 일 저지르는 건 지 엄마랑 똑같다니까.”
순정이는 언니를 위로하며 말했다.
“잘했어요. 남자들은 마누라 무서운 걸 알아야 해. 그래야 다시는 그런 짓 안 하죠. 겸이아빠도 잘못했다 하시죠?”
유리가 순정의 말에 보태며 진희언니를 위로했다.
“그러게, 겸이아빠는 항상 왜 혼날 짓을 만드시는지.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못하실 거면서.”
사실 우리 셋 중 겸이 아빠를 정식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들 픽업하면서, 잠깐 집에 들렀다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인사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겸이 아빠는 이번 일로 졸지에 철없고 이기적이고 생각 없는, 그래서 자기 엄마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얻었다.
진희언니는 알바생을 부르기 위해 테이블 버튼을 누르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나서야 모든 일이 해결이 되니 너무 피곤해. 어쩜 다들 자기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매일 문제를 만들까 몰라.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메뉴판을 가져온 알바생이 유리에게 메뉴판을 건넸고, 유리는 받자마자 다시 진희언니에게 건넸다.
“언니 먼저 골라봐요. 우리 아직 주문 안 했거든요.”
유리 말에 진희언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우리 셋을 쳐다봤다.
“뭐야, 아직도 주문 안 한고 있었던 거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 거니? 이것들아, 제발 알아서 좀 해라, 진짜. 니들만큼은 내 손이 안 가도록 알아서 착착 할 수는 없는 거니. 하하하.”
진희언니는 모두가 자기만 바라바고 있다는 사실에 좋다는 건지 아니면 초월했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이며 알바생에게 피자 한 판, 해물 스파게티 하나, 크림 리소토 하나 그리고 콜라 네 잔을 시켰다.
예전부터 나는 콜라를 못 마신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또 잊어버렸는지 언니는 묻지도 않고 콜라 네 잔을 주문했다. 나는 알바생에게 콜라 대신 주스로 달라고 말하려는 찰나 메뉴판을 덮고 종업원에게 “콜라 네 잔 먼저 빨리 주세요.”라고 말하는 진희언니를 보고 주스 먹는 걸 포기했다.
콜라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신 진희언니는 갑자리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물었다.
“아참! 선혜 너, 오늘 오전에 에듀포레 부동산에 들러서 천에 삼십오짜리 사무실 알아봤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