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벌일 게 아니라 남편이 더 좋은 회사로 갈아타도록 도와주는 게 훨씬 이익 아냐?"
"그거야 제가 할 일이 아니라 남편이 알아서 할 일이죠. 제가 무슨 엄마도 아니고."
진희언니는 한숨을 쉬었다.
"남편이 잘되면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군데 남처럼 말해. 남편 능력이 니 능력이고 남편 돈이 니 돈이지. 계산이 왜 그래?"
옆에서 듣고 있던 순정이 끼어들었다.
"선혜언니가 또 계산하면 칼이죠. 무조건 엔 분의 일. 크크"
옆에 듣고 있던 유리는 순정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우리 타요 모임이 지속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엔 분의 일이지. 하하하"
유리와 순정의 진담 같은 농담은 좋지도 않았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저는 남편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이직을 하든 퇴직을 하든. 퇴직하면 제가 일하면 되고 남편이 집안일하면 되죠."
“너 마누라가 왜 있는 줄 아니? 남자가 가장 노릇 제대로 하도록 도와주라고 있는 거야."
진희 언니는 진심으로 민서 아빠를 남자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저도 일을 하고 싶어서요. 이제 민서도 다 커서 손 갈 일도 없고. 그리고 언제까지 민서 아빠한테만 기댈 수는 없잖아요. 저도 제 인생이 있는데.”
“니 인생이 뭔데? 남편 능력 키워줄 생각은 안 하고 니 인생 찾겠다고 대출받아서 일하는 거?”
진희언니의 걱정은 이미 선을 넘었지만 정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가 일하면 어떻고 누가 벌면 어때요. 능력 있는 사람이 더 일하고 더 벌면 되죠.”
“세상모르는 소리 하고 있다, 진짜. 멀쩡한 남편 집에 들여앉히고 여자가 돈 번다고 해봐라. 기 센 여자라고 뒤에서 욕이나 처먹지.”
유리는 대화를 듣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언니, 진희언니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게 수정이 영어 학원 원장이 딱 그래요. 원래 와이프 혼자 학원 운영했는데 학원이 잘 되니까 남편이 회사 그만두고 학원 차량 운전하더라고요.
말이야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남편한테 부탁했다고 하지만 솔직히 마누라 운전 기사지 뭐. 근데 마누라 원장이 덩치도 크고 대장부 같아 그런가, 괜히 남편이 짠해 보이더라.
차에서 김밥 먹고 있는 거 봤는데 와이프 밥도 못 얻어먹나 싶더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순정이가 말했다.
“뭐,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싫지 않으니까 지 일 때려치우고 마누라 밑에서 일하겠지. 마누라가 월급을 많이 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밤일을 잘해주거나?”
유리와 순정은 낄낄대며 웃었다. 진희언니는 둘이 웃는 걸 어이없게 쳐다보다 나를 보며 물었다.
“너도 저런 소리 듣고 싶어?”
“또 누가 알아요. 저도 잘 돼서 민서 아빠 기사로 부려먹을지.”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와, 언니 상상만으로도 완전 좋은데요. 언니 잘 돼서 학원 크게 차리면 나 실장으로 써줘요! 내가 또 인사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 ”
유리는 늘 그랬듯이 잘 되면 자기 좀 써달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제대로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으면서 남 잘 되면 그 옆에서 덕이나 보겠다는 의미라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니었지만 오늘은 딱히 듣기 싫지 않았다.
“잘 되기만 하면 실장이 문제겠어?”
라고 말하며 김이 덜 빠져 공기방울이 올라오는 콜라를 들이켰다. 탄산이 목을 찔렀지만 견딜 만했다.
“아이고, 우리 선혜가 기가 이렇게 센 줄 몰랐다. 근데 선혜야. 내가 시어머니라면 너처럼 기센 엄마가 키운 딸은 며느리로 안 볼래. 기 센 엄마가 키운 딸이면 뻔 할거 아냐. 그 엄마에 그 딸 아냐? 혹시나 우리 아들 기죽이면 어떻게 해.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나는 그 꼴은 못 보겠다. 안 그래, 상준엄마야?”
하며 순정을 쳐다봤다. 순정은 굳어버린 내 얼굴을 봤는지 웃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순정이의 태도에 따라 이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도, 아니면 다음 만남을 완전히 기약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순정은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전 모르겠습니다. 아들도 딸도 있어서요. 하하.”
순정은 유리를 쳐다보며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분위기를 파악한 유리는 지난번에 공구하려다가 가격이 비싸서 못 샀던 스타벅스 수저 세트가 다시 나왔다고 살 건지 물어보며 핸드폰을 들었다.
아직 보증금도 마련하지 못한 기약 없는 나의 사무실 이야기는 미래의 민서 남편과 그 시어머니에게까지 닿아 있었다. 졸지에 나와 민서는 한 사람의 욕망을 꺾어버리는 빌런과 잠재적 빌런이 되었다.
오늘도 역시나 농담과 진담의 사이를 미세하게 오가는 불쾌한 대화로 끝이 났다. 물론 불쾌한 건 나 한 사람이었지만.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아까 진희언니 말에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게 억울하기도 하고 부아가 났다. 곱씹을수록 화가 삭질 않아 안 되겠다 싶어 ‘타요’채팅방을 열었다.
‘진희언니,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겸이 아빠는 언니한테 관리받아 좋겠어요. 꼴랑 35만 원짜리 중고 자전거 하나도 마음대로 못 사고 환불받은 것도 관리라면 관리겠죠. 근데요, 그런 언니처럼 드센 엄마 밑에서 관리받은 아들은 저도 별로네요. 겸이가 우리 민서한테 순결이라도 줬다가 언니가 당장 가서 환불받아오라고 하면 어째요. 언니가 아무리 지켜봐도 못 받아 갈 텐데. 아 근데 겸이가 민서 스타일이 아닌 게 제일 문제긴 하네요.’
전송을 누르려다 씨발,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하며 나는 백 스페이스키를 꾹 눌렀다. 이 방에서 탈퇴하기엔 나는 아직 얻을 것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