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언니는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눈으로는 '감히 이것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근데 언니, 겸이는 그 문제가 아니라 ……”
라고 내가 말을 꺼내려는데 언니의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와 내 눈은 핸드폰으로 향했고 화면에는 ‘유스 오케 지휘자’라고 쓰여 있었다.
“이 사람도 양반은 글렀네. 여보세요. 네, 지휘자님.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화기 너머 들리는 지휘자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언니는 그의 말을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유리와 순정은 통화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다물자는 눈빛을 보냈지만 사실 누구보다 그 대화를 엿듣고 싶었기에 조용히 있다가도 전화기 너머 지휘자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라도 하면 ‘뭐라는 거야?’ 하며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휘자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진희언니가 입을 뗐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지휘자님, 이건 아셔야 할 거 같아요.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애들 앞에서 그렇게 망신을 주시는 건 인격 모독이고 침해예요. 열 살 애도 사람인데 프라이버시도 생각해주셔야죠. 돈 받고 잘 가르쳐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 자존감 지켜주는 것도 지휘자님 역할인데.”
시작과 달리 진희언니의 말은 길어졌고, 듣고만 있는 건지 어쩐 건지 지휘자는 말이 없었다.
“암튼 잘 알겠습니다. 지휘자님에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네요."
언니는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오케스트라를 계속 보낼 건지 아니면 그만두겠다는 건지를 생각해본다는 뜻일 테다. 대화의 맥락만 보면 진희언니는 승리자였지만, 표정은 영락없는 패배자의 것이었다.
언니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카톡을 보냈다.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어느 때보다 빨리 움직였다.
너, 이 쌍놈 새끼, 도대체 그딴 걸 왜 찍어서 엄마 개망신을 줘? 집에서 보자. 가만 안 둔다.
겸이에게 보내는 카톡이었다. 언니는 전송을 누르고는 숨을 골랐다. 그제야 내가 언니 옆에 붙어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홈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휘자님이 뭐래요? 왜 그랬대요?”
언니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한숨을 쉬었다.
“별 것도 아니야. 애들이 지 우습게 보니까 벼르고 벼르다 재수 없게 겸이가 뒤집어쓴 거지. 애가 이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살라고 하는지 걱정이다. ”
나는 진희언니의 표정을 보았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는 진희언니의 이해력에 소름이 돋았다. 언니의 터부니 없는 재해석 실력 덕분에 겸이는 혼날 짓을 해서 혼난 게 아니라 재수 없어 혼난 억울한 애가 되었고, 지휘자는 지멋대로 기분파에, 열한 살짜리 학생이 취미로 하는 사생활도 인정해주지 않는 옹졸하고 애보다 못한 어른이 되었다.
진희언니는 "어머, 내 정신이야." 하더니 먼저 가봐야겠다며 서둘렀다. 겸이 인강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미리 가서 세팅해놔야 수업에 늦지 않는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는 공구한 마스크는 이틀이면 도착하니까 오면 바로 연락한다 말했고, 순정은 겸이가 듣는 인강이 어떤지 보고 괜찮으면 정보 좀 달라고 했다. 진희언니는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들한테는 아낌없이 풀겠다는 말도 보탰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를 겨드랑이에 꼈다. 인터넷 셋톱 박스였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멋쩍게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했다. 언니는 내 인사를 듣지 못했는지 대답하지 않은 채 나갔다.
순정과 유리는 다음에 외곽에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오픈 이벤트 기념으로 카페 시그니처 메뉴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사은품으로 머그컵을 준다고 했다. 순정은 난 집에 머그컵 많은데,라고 했고 유리가 그럼 받아서 나 줘요, 그 컵 스벅 머그랑 똑같거든요. 하며 좋아했다. 역시 옆에서 공짜로 주워 먹는 덴 선수인 유리다. 나는 순정을 보며 물었다.
“근데 아까 언니가 들고 간 셋톱 박스는 뭐야?”
“아. 그거요? 언니 몰랐어요? 진희언니 애들 집에 두고 외출할 때마다 셋톱 박스 빼서 가지고 나오잖아요.”
“셋톱박스를? 왜?”
“언니 집에 없을 때 지들끼리 컴퓨터로 이상한 짓 한다고 아예 인터넷을 못하게 한다고요. 한참 됐는데.”
유리도 몰랐는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와, 진짜? 대박이다. 나는 그래 봤자 코드 빼놓는 게 전부 인데. 어떻게 셋톱 박스 들고 다닐 생각을 어떻게 했지? 진짜 신박하다! 크크크.”
“왜, 진희언니답구만. 언니가 맨날 하는 말 있잖아. 내가 모르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하.”
“에휴, 그렇게 막으면 뭐 하나. 겸이가 반푼이도 아니고. 수정이 말 들어보면 엄마 몰래 못된 짓도 꽤 하는 같던데. 언니 혈압 오를까 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야, 절대로 하지 마. 괜히 말했다가 너도 지휘자 꼴 나고 싶냐? 오케스트라 단톡방에다가 언니가 지휘자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쓴 거 못 봤어?”
둘이 떠드는 동안 나는 카톡을 열고 ‘타요단톡방'을 찾아 열어 보았다. 최근순으로 스크롤하며 따로 저장해둘 만한 정보가 있는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타인의 사생활을 알아야만 했다.
진희언니가 모르는 세상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거나 언니가 손에 쥘 수 없는 세상 둘 중 하나였다. 이 단톡방에서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내 사생활은 아직 언니가 쥘 수 있는 세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콜라를 마신 것도 아닌데 목구멍이 뜨끔거렸다.
그날 밤, 자리에 누운 나는 그동안 ‘타요’ 단톡방에서 얻은 수많은 정보들을 곱씹어 보았다. ‘타요’ 단톡방에서 나는 혜택은 가장 많이 보면서 정작 정보를 물어다 주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괜히 미안해졌다. 아무래도 작게나마 성의를 표시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오늘 줄 정보는 셋 모두에게 만족을 주진 못해도 적어도 ‘정보 먹튀’ 소리는 듣지 않겠지?'
나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진희언니, 겸이가 지휘자님 앞에서는 동영상을 지웠다고 하는데 혹시 모르니 사진 앱에 있는 휴지통까지 다 지우세요. 혹시나 겸이가 다시 복구해서 그 여자 아이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라도 하면 그땐 모르긴 몰라도 겸이가 귀여운 쌍놈 새끼로만 끝나진 않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얘들아, 혹시 진희언니가 휴대폰에서 휴지통을 못 찾으면 어떻게 찾는지 꼭 알려줘. 언니가 생각보다 심각한 기계치더라고.
전송을 누르고 옆에 숫자가 줄어드는 걸 확인한 후 나는 ‘나가기’를 눌렀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진희언니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다시 카톡을 열고 진희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데 인사라도 할 걸 그랬어요. 지금처럼 주변 관리 잘하면서 잘 살길 바라요. 언니 사생활 망치는 저 같은 빌런은 안 만나길.
나는 1이 사라지기 전에 친구 차단을 눌렀다. 나는 아직 잃어버리기엔 아까운 사생활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