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4등급 귀신입니다(4)

죽어서도 1등급을 향해       


마음이 급해졌다. 기한이 정해진 것도,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하루 빨리 엄마의 꿈에 꼭 나타나고 싶었다.


업을 쌓을 만한 일을 찾아야 했다. 내가 누구를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누구에게 도움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살면서 했던 일이라고 골방에서 남의 SNS나 들여다보며 ‘좋아요’ 아니면 ‘싫어요’를 누르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만 났다.


생각해보면 내가 4등급 귀신이 된 건 당연한 것 같았다. 나에게는 억울함도 분노도 없었다. 뭣도 없이 태어난 애들은 노력해도 뭣도 가질 수 없다는 태생적 패배주의 이론이 무기력으로 채운 서른셋 인생을 뒷받침하는 모토였으니까.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도저히 해결이 나지 않을 거 같아 우선 밖으로 나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찾아보면 뭐라도 걸리겠지.      


*

주기적으로 용산역 한쪽이 소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용산역 1번출구에 입점한 드럭스토어 롭스. 처음엔 면세점을 잘못 찾은 중국 여행객들이 내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롭스 알바생 팬카페 회원들이었다. 신분은 알바생지만 얼굴은 1등급 연예인 후려친라고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얼마나 대단한 얼굴이기에 소속사 연습생조차도 안되는 알바생에게 조공팬이 생겼나 싶어 롭스에 슬쩍 들어가 보았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웬만한 연예인이 와도 절대 기죽지 않는 영롱한 외모와 구분선 없는 기럭지. 사람들은 알바생에게 저세상 외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49재가 지나도록 경험해온 바, 장담하건데 이 세상에도, 저세상에도 저런 외모의 소유자는 없다.


저렇게 생겼으면 가만히 서 있어도 인센티브를 받을 텐데 시키지 않은 일까지 참 열심히도 한다. 어떻게 안팎으로 저렇게 성실할 수 있을까. 가진 거라곤 4등급 영혼뿐이지만 이 비루한 영혼이라도 팔아서 돕고 싶은 외모다. 그래, 오늘은 너다.


기회를 노리기 위해 하루 종일 롭스를 기웃거렸지만 좀체 빈틈을 보이지 않는 알바생이다. 유로 결제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모습이다.


“사장님 저 점심 먹고 올게요.”

“어 그래. 올 때 눈에 안 띄게 조심하고. 지들이야 좋다고 달려드는 거지만 깔려 죽겠더라.”

“하하. 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알바생은 앞치마를 벗고 5층에 있는 스타벅스로 가서는 ‘돌체콜드블루’를 주문하고 쿠폰 바코드를 들이댔다.


“이건 언제 다 쓰냐. 아직도 68장이나 남았네.”


알바생 어깨너머로 보이는 핸드폰 사진첩엔 캡쳐 해둔 스타벅스 쿠폰이 끝도 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저것만 팔아도 두 달 치 알바비는 될 것 같다.


“저번에 파라다이스 공지사항에다 스벅 쿠폰은 그만 보내라고 써놨는데도 참 말 안 들으시네.”


알바생은 그 많은 쿠폰을 보면서도 기운이 없다. 자리를 잡고 앉더니 네이버 검색창에 검색어를 넣었다.      


지뢰사정 사우 피임약 파는 약국     


아무리 찾아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지 표정이 초초했다. 지뢰사정……사우……는 뭐지? 지뢰 사정이라……설마 질외사정? 그럼 사우는 사후? 발음 나는 대로 썼다고 하기엔 하, 이 알바생 너무 무식하다. 아무리 외모가 모든 건 다 덮는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여자친구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질외사정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이 무식한 지뢰사정까지 봐주려면 보통의 사랑으로는 극복하기 어렵지 싶다.


어떻게든 이 사랑을 지켜주고 싶은 나는 머리를 굴려보는데 알바생이 배를 잡더니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앉은 알바생은 힘을 주면서도 각종 포탈이며 인터넷 카페마다 지뢰사정을 입력하고 검색을 멈추지 않았다. 지뢰사정으로 써서는 알바생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화장실을 두리번거렸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돕는다고 했다. 알바생이 앉아 있는 화장실 문 앞에 한줄 문구가 쓰여 있었다.      


혹시나 불안하다면? 노레보 사후피임약!

경고: 질외사정은 피임이 아닙니다.     


‘이봐요, 알바생. 제발 고개를 한 번만 들어 앞을 봐요!’

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들릴 리가 없다. 다시 우주의 힘을 빌려야 했다. 나는 입에 바람을 넣고 숨을 참고 크게 뱉었다. 바깥이라면 바람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화장실은 사방이 막혀 있어서 오로지 내 힘으로만 해내야 한다. 길게 넘긴 머리카락이 내려오면서 알바생의 눈을 찔렀다. 불편했는지 고개를 들고 앞머리를 뒤로 넘기다 화장실 문에 붙여진 광고 종이를 봤다. 알바생은 찬찬히 읽어보았다.


“아하, 지뢰가 아니라 질외사정이구나.”


알바생은 힘을 주다 말고 네이버 검색창에 ‘질외사정 사후 피임약 약국’이라고 입력하고 그제야 용산역 근처 사후 피임약을 파는 약국 이름이 주르륵 나왔다.


“휴, 다행이다.”

휴, 나도 다행이다. 이 알바생아.


알바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바지 지퍼를 올리는 것도 까먹고 그대로 걸어나갔다. 지퍼가 열렸으면 어떠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알바생의 지퍼가 아니라 알바생 얼굴에 집중할 뿐인데.


이제 시작이지만 4등급 귀신이 1등급으로 가기 위해 일하는 건 극한의 노동 중의 하나인 게 분명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4등급 귀신입니다(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