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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질환을 직업병으로 '퉁' 치면 안되는 이유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리뷰


직업병, 말 그대로 직업으로 인해 얻은 병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경력과 바꾼 훈장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포장하기엔 딸려오는 고통이 여간 참기 힘들다.

그것도 그렇지맘 지금 내가 앓고 있는 고통이 직업병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증명한다 한들 얻을 수 있는 것도 그닥 없다. 오히려 손해이면 모를까. 행여나 질병을 앓는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했다간 그와 동시에 효율성이 떨어지는 노동자로 분류되어 노동 현장에서 점차 밀려나거나 완전히 제외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계속 일하고 싶다면, 실업자가 되기 싫다면 아파도 참고 견디거나,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직업병이 호전되기만 한다면 문제될 게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 게다가 직업병은 파생상품처럼 다른 질환을 만든다는 것, 그 고통과 경제적 부담은 오로지 노동자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진다는 점은 사실 놀라울 것도 없다.


일하다 다쳤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흔해 빠진 이야기다. 그러나 고용주로부터, 회사로부터,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는 말은 좀체 듣기 어렵다. 무엇 때문일까. 그건 노동자를 책임지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란 단어의 무게는 그 자체로 매우 무겁다. 책임지겠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책임이란 무게가 때때로 그 주체가 가진 능력을 훨씬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러한 무게 때문에 주어진 책임에 대해서 묵묵히 지는 주체들이 무한한 신뢰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곧 돈이고, 자본이 자본을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임이란 단어는 너무나 거추장스럽고 또 쓸데없이 무겁다. 기업윤리니 기업복지 하는 것들은 효율성에 따라, 정확히는 이윤에 따라 ‘유도리’ 있게 적당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고용주는, 기업은, 그리고 국가는 효율성을 명분으로 유도리를 핑계로 노동자의 권리를 삭제한다. 권리가 없는 곳에는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일할 의무는 있지만 노동으로 인해 아플 권리는 없다. 노동하다 다치는 건 노동자가 무능하기 때문이지 노동 환경이 열악해서가 아니다.

산업재해의 혜택을 받는 사람을 노동계의 행운아라고 말하는 게 농담이라니 그저 씁쓸할 뿐.


노동자, 특히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자신이 앓고 있는 질환을 그저 피부병, 근육통, 노환 등으로만 표현하는 것으로 에둘러 표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질환에 인과 관계를 증명하고 또한 고통의 이름을 달아주고 명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을 쓴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각종 노동으로 인해 얻은 신체의 고통이나 정신적 괴로움은 노동자 개인의 능력이나 인내력 부재가 아니라 기형적으로 부조리한 노동 시장에서 발생한 필연적인 사회적 고통이라고, 단호하지만 간절하게 말하고 있다.  

        

노동에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최소 비용, 최대이익. 중학교 사회 시간에 배웠던 기업의 목적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 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자재(재료)를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 그리고 인건비를 줄이는 것.

그런데 요즘처럼 고물가 시대에 자재 구입비용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게다가 소비자 수준이 높아지면서 질에 대한 기대치 역시 높아진 탓에 무작정 싼 재료를 쓰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걸 기업은 잘 안다.

결국, 줄일 수 있는 건 인건비다.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 역시 두 가지다. 고용 인원을 최소화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임금만 지불하는 것. 물론 기업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인 건 최소 임금으로 최소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환경은 노동자에게는 최악이나 마찬가지며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질을 나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다.


 노동 환경이 열악한 기업에는 노동자가 모이지 않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기업이 문제없이 운영되는 이유는 그런 곳에서라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한 일을 오래 하고 싶은 사람도, 자랑스러운 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최대한 빨리 돈을 모아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할지 몰라도 말이다.

최근 들어 휴직과 이직이 잦은 것을 두고 ‘요즘 사람들’의 참을성을 비판하는 언론들이 있는데 그건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절대 오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노동 분야가 경험이 없는 청년과 경력단절 여성이 일하는 분야다.


최저 임금에 불안정한 고용상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일자리. 이런 일자리를 얻게 되는 것은 경력 단절을 했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면 질 낮은 일자리를 만들어 놓고 경략 단절 여성만을 뽑기 때문인가.


나는 후자라고 본다.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중장년 여성 노동자들이 수두룩한데 굳이 고임금이나 안정적 일자리, 승진 따위를 제공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회적 인식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다.     


기업은 영리하다. 능력 있고 오래 고용할 수 있는 노동자 대신 최소한의 임금만 지불해도 되는 노동자를 찾는다. 청년은 경험과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가 정해놓은 최소한의 임금보다 더 주는 걸 아깝다고 생각한다. 경력 단절 여성은 말 그대로 단절을 이유로 그전에 이루어놓았던 경력을 모두 무시한다.

기업의 얉은 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일할 기회를 얻었다는 간절함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절함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비인간적인 대우가 지속된다면 언제가는 분노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기업은 잊어서는 안 된다. 투자 비용을 최소화하여 이윤을 최대화하겠다는 기업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한 존재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기업 이윤의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기업은 오래갈 수 없다. 그들이 부려 먹은 노동자는 곧 자신들의 소비자기 때문이다.   


사고 조사는 해도 문제는 해결 되지 않는 이유

누구나 깨끗한 곳, 안전한 곳, 밝은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그런 곳일수록 경쟁률은 당연히 치열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려면 스팩이 좋을수록, 학벌이 좋을수록, 좋은 성적을 가진 사람일수록 유리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이른바 ‘공정한 사회’라고 믿는다.)

 더러운 곳, 위험한 곳, 어두운 곳은 많은 사람이 꺼린다. 되도록 멀리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아예 모르고 싶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어렵고, 위험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은 되도록 멀리하거나 모르고 싶다.

이런 해결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웃소싱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하청, 위탁 업체다. 하청, 위탁, 외주라는 말은 겉으로 보면 업무의 분화, 상생 관계처럼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비용 절감과 위험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본청의 꼼수가 숨어있다.

노동하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받았을 경우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는 산업재해보상제도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소규모 영세 기업의 경우 가입이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노동자의 경우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인데 보험에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 보험 가입을 꺼리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산재보험에 가입되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입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가 내가 했던 노동으로 인해 얻은 것인지 증명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증명하기엔 걸림돌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약에 오래 노출되는 직업으로 인해 피부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을 때 이 노동자의 피부질환이 오로지 농약 때문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농약 이외에 피부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변수를 모두 차단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노동자가 정해진 방호복을 입지 않았다면, 법적으로 정해진 노동 시간보다 훨씬 많은 노동을 했다면, 정해진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건 오로지 노동자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지 농약으로 인해 얻은 질병이 아니다.

노동자의 질환은 내 고통이 아닌 이상 아무리 말해봤자 ‘안됐네’, ‘딱하다’는 말로 소비되고 마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불행한 사정일 뿐이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과 관계없는 노동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화려함에 감춰진 공기업 하청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내 가족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외면한다. 외면하는 노동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속에 감춰진 노동자들의 고통은 알 수 없다.     


그런 직업도 있었나, 싶을 만큼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직업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도 멋있는 게 분명한 직업도 있지만 몇 번을 반복해 들어도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직업도 많다.

 중요한 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수만 가지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묵묵하게 일하고 있는 덕분에 우리 사회가 문제없이 잘 굴러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논리, 기업의 논리만으로 노동 시장이 문제없이 잘 굴러가길 바라는 건 지나친 낙관론에 가깝다.

 따라서 노동자와 기업의 갈등을 뛰어넘는 보호막이 필요하다. 그건 바로 국가다. 노동자들이 양질의 노동을 위해서 국가는 최소한의 보호막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노동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비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는 건 기본이다.


그림자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

18년 동안 방역 노동을 한 이학문 씨는 현재 뇌가 쪼그라드는 다계통 위축증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이 장기간 독한 소독약에 노출된 탓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이미 증상이 한참 진행된 후였다. 현재 산업재해 요양을 신청한 상태라곤 하지만 승인될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방역 노동을 하면서 자신이 사용한 약품 성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 한 번도 교육받은 적이 없으며 보호 용품이라고 할 만한 것도 면장갑과 마스크가 전부였다고 말한다.


노동자의 권리는 법으로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원칙대로 지키는 사업주도, 노동자도, 그리고 시민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게 현실이다. 영세한 업체라는 이유로, 관리 기관이 없는 빈틈을 핑계로, 고객들은 자신의 권리를 이유로 노동자의 권리 따위는 늘 가장 마지막으로 밀어버린다.


그림자 노동,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노동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일해야 하는 노동이다. 하기 힘든 노동, 위험하거나 더러운 노동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행해져야 한다. 타인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감동적인 서비스, 빠른 고충 처리, 철저한 방역이란 말 뒤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고통은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다.

유감스럽지만 위험하고 부당한 노동은 우리 노동 시장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굴러가려면 꼭 필요한 노동이고, 결국 누군가가 그 노동을 묵묵히 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단, 그 누군가는 내가 될 수 있고, 내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내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사라질 수 없는 노동이라면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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