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tv <며느라기> 리뷰
힘드니까 같이 벌어야 하는 건 맞지만,
집안일은 좀…
워킹맘 하면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커리어 우먼에 가까운 ‘워킹’ 맘. 자신의 커리어는 물론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해결사다. 업무 시간까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해 집으로 가져가 팀원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반대로 가정사 따위로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꾸밈 노동도 게을리하지 않아 언제나 ‘풀메’에 세련된 옷차림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이런 ‘워킹’ 맘은 티브이에서는 꽤 자주 본 것 같은데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내 친구의 아는 사람이거나, 친구의 친구의 아는 사람 정도로 흔치 않다.
다른 하나는 죄송과 부탁의 말을 옵션처럼 달고 사는 워킹 ‘맘’. 밀린 업무를 해결하지 못해 퇴근 시간을 코앞에 두고도 동료들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죄송을 말하고, 예상치 못하게 야근이라도 하게 되면 남편이나 부모님, 하다못해 지인에게 아이의 돌봄을 부탁하며 또다시 죄송을 말한다.
육아에 전념했을 때 수도 없이 들었던 ‘맘충’도 모자라 복직 후엔 ‘월급충’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판이라 이 말만은 피하고 싶은 마음에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가지만,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해결해야 하는 건 밀린 업무가 아니라 방치된 아이들의 끼니와 산처럼 쌓인 집안일이다.
한숨과 미안함, 그리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분노가 쌓이고, 이 분노가 폭발하면 워킹맘과 가족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이 모든 것을 견디며 일을 사수하든가, 아니면 다 포기하고 퇴사하든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개인의 의지고 마음이지만, 그다음에 하는 질문인 ‘그렇다며 누가 그 선택을 (해야) 합니까?’를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떠올리는 건 당신뿐만은 아닐 것이다.
산업화가 도래하고 바깥일, 즉 경제 노동을 하는 주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여성도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성별과 관계없이 경제 노동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또 믿는 시대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여성이-때로는 남성보다 더-살기 좋은 시대가 온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성별에 따른 경제 노동 기여도에는 눈에 띄는 변화를 겪었지만, 가정 내 남성과 여성에 있어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의 역할과 기여도를 들여다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양적인 측면에서 가사와 돌봄 노동에 참여하는 남자 비율은 늘었는지 몰라도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십보백보 수준이고, 높아진 여성의 경제 노동 기여도에 비교해 정규직/관리직 등 고임금을 받는 직군의 여성 노동자 참여 비율의 변화를 보면 오십 보라는 말조차 민망할 정도다.
어떠한 이유로 여성은 경제 노동에서 남성보다 먼저 제외되어야 하고, 배제되어야 하는 걸까. 신체적, 물리적 조건을 비롯하여 여러 이유를 떠올리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경제 노동은 그에 따르는 대가를 보장받는 이른바 유급 노동이지만, 가사와 돌봄 노동은 보수나 대가가 따르지 않는 무급 노동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강하게 말하자면 효율성과 생산성을 전제로 하는 남성의 노동력을 한낱 가사나 돌봄 노동과 같은 무급 노동에 낭비할 수 없다는 사회적 당위성이 자연스럽게 여자들을 경제 노동의 우선순위에서 배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가사와 돌봄 노동에 보수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전업주부의 노동을 임금으로 환산했을 때의 비용을 말하며 따져 묻지만, 대개는 그저 농담으로 휘발되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아내 혹은 엄마의 자격이 부족하다며 자질을 의심받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면서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은 으레 사랑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숭고한 행위로 적당히 포장되고 그 숭고한 일은 인내와 희생에 최적화된 여자의 몫으로 돌리곤 한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도 바뀌었다. 공동체를 유지 지속하기 위한 경제적 토대가 변하면서 가치관, 문화, 신념도 바뀌었다. 그러면서 그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더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끝까지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은 그래도 여성들의 일이라 여기는 사회적 요구다.
밥하는 사람 따로, 밥 먹는 사람 따로
드라마 「며느라기」는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 한 것으로 당시 웹툰 출간 당시에도 여성들 사이에서 많은 공감을 얻은 텍스트다. 드라마는 시즌 1과 시즌 2를 합쳐 모두 24부작으로 제작되었다. 시즌1은 결혼과 동시에 이른바 ‘며느라기’에 진입한 주인공 민사린이 겪게 되는 며느리로서의 의무와 그 갈등을 담고 있다면, 시즌 2는 민사린이 출산과 육아를 겪게 되면서 맞닥뜨린 커리어와 가사와 돌봄 노동 사이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담고 있다.
시즌 1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갈등은 밥으로 은유되는 가사 노동과 그것을 해야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부탁하는 시누이, 반찬을 챙겨주는 어머니의 고마움을 외면한다고 화내는 남편, 아들의 끼니를 걱정하며 며느리의 출장을 말리는 시어머니. 결혼한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듣고 겪었을 법한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하지만 사린의 시선으로 객관화되면서 이 자연스럽고 당연함은 불편하고 불쾌한 무엇으로 바뀌게 된다.
모든 갈등의 시작은 밥에서 비롯되는데, 가사 노동 중에서도 음식 노동은 가장 많은 시간과 힘이 필요한 노동이다. 재료 준비부터 치우는 것까지가 음식 노동이라면 최소 반나절 이상은 이 음식 노동에 써야 한다. 그러나 먹는 사람에게 보이는 건 잘 차려진 한 상일뿐 그 앞과 뒤에 들어간 노동과 시간은 잘 알지 못하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명절 음식을 준비로 힘들어하는 사린을 보며 눈치가 보인 사린의 남편 구영은 양복 차림으로 음식 노동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보지만 말리는 아버지와 사린이 하나면 충분하다는 어머니 말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주방에서 퇴장(당)한다. 가사 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사린은 결국 구영에게 화를 내고 구영은 사린의 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동시에 엄마가 싸준 음식을 보며 고생한 엄마가 떠올라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결혼하면 남자는 효자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는 아마도 ‘우리 엄마가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건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 때문에 고생하는 건 안 된다.’라는 이중 논리에서 만들어진 말일 테다.
한편 커리어에 도움이 될 해외 출장 소식이 결정되자 기뻐하는 사린과 달리 시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혼한 남자는 아내가 차려준 밥 먹고 대접받으며 살아야 하는데 고작 일 때문에 집을 비운다고 하니 걱정스러워 시어머니는 사린에게 출장을 가지 말라고 돌려 말한다. 사린은 남편의 밥과 커리어 사이에서 고민하고 결국 출장을 포기한다. 그 이유가 정말로 남편의 밥 때문인지 아니면 두고두고 곱씹을 어머니의 잔소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로지 사린 자신의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씁쓸해지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
뼈 빠지게 공부시켜놨더니 애 키운다고?
시즌 2는 사린의 출산과 육아라는 돌봄과 관련된 갈등을 담고 있다.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된 사린은 걱정이 기쁨보다 앞선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걱정은 커리어 단절에 대한 두려움과 육아와 돌봄 문제다.
임신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현실이 되어 번번이 사린의 커리어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임신이란 사적인 이유로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 싫어서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업무를 완료하려고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렇게 무리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고 쉬라는, 경고에 가까운 조언이다. 반대로 구영의 동료들은 이제 부양할 가족이 늘었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구영에게 축하주를 권한다. 기혼에 자녀가 있는 남자에게는 활발한 경제활동을 도모하라며 용기를 주지만 여자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분위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위로한답시고 ‘애 보는 게 돈 버는 거야’, ‘집에 있는 게 돈 버는 거야’, 하다못해 ‘가만히 있는 게 돈 버는 거야’하는 말은 (잠재적) 경단녀에게 하는 위로라기보다 ‘빨리 체념하도록 만드는 주문에 가깝다.
한편 커리어와 임신을 동시에 겪으며 돌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 혼자서 해결하려는 사린과 달리 구영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닥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수시로 부모, 더 정확히는 엄마를 호출한다. 물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먼저 도움을 청할 것을 생각하는 행동은 독립된 성인이자 개인으로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독립보다 의존을, 변화보다 유지를 선택한 구영은 임신 후 체력이 바닥난 사린의 앞에서, 비싼 조리원 비용 앞에서, 앞으로의 육아 문제 앞에서 번번이 부모를 호출한다. 결혼하기 전과 달라진 현실 앞에서, 그리고 앞으로 더 달라질 현실 앞에서 구영 자신은 자신을 지키려는 방법으로 변화 대신 항상성을 선택한다. 구영이 생각하는 배려나 희생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는 것까지만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은 그것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미래의 욕심만 포기하는 것을 두고 희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구영은 겉으로 보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착한 남편, 그리고 엄마를 사랑하는 착한 아들이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원치 않는 변화는 되도록 지연(遲延)시키려 애쓰는 어른이,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은 어른이기도 하다.
구영과 달리 구영의 형인 구일은 육아와 돌봄 문제를 두고 아내와 대화 끝에 결국 퇴사를 결심한다. 경제 활동은 더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창출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맞는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그 결정을 들은 구일의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낸다. 이유는 하나다. “뼈 빠지게 일해서 공부시키고 취직시켜놨더니 애를 키운다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요즘 세상에 뼈 빠지게 번 부모가 돈으로 공부하고 취직한 건 단지 아들(남자)만 해당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모두 똑같이 부모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고, 고생해서 취직한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남자는 자연스럽게 집안을 일으키는 가장이 되고, 여자는 가사와 돌봄의 주체가 된다. 여기에 누가 더 가장 역할을 잘하는지, 누가 더 가사와 돌봄 노동에 적합한지는 고려하지 않을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 회사 같은 공적 영역에서는 개인의 수행 능력과 적합성이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지만, 가사와 돌봄 영역에서는 오로지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 조건만 따질 뿐이고 적합성, 능력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워킹맘은 능력자라는 명제 앞에서
산업화 이전에는 남자=부양자, 여자=가사 노동 담당자라는 완벽한 분리 시스템을 기반으로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던 만큼 서로의 영역에 관해서 관심 밖인 것은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산업화 이후 남자와 여자 모두 경제 노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성별에 상관없이 능력과 취향에 따른 업무 선택이 가능해진 사회로 변모했지만, 가사 노동만큼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즉 경제 노동은 이제 남자와 여자 모두의 것이 되었지만 가사 노동은 여전히 오로지 여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잦은 다툼의 원인을 들어보면 대개 가사와 돌봄 노동과 관련된 것임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가정을 이룬 남자와 여자 모두가 일하게 되면 가사든 돌봄이든 가정에는 불가피하게 소외된 영역이 생기게 마련이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타협은 필수다. 그러나 타협의 과정은 험난 그 자체다. 그래도 가장은 남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 아무리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 앞에서 일을 포기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일 때 쏟아지는 우려와 의심, 그리고 비난은 능력 있는 여자가 일을 그만두게 하고, 남자가 가사와 돌봄 노동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드는, 그래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장애물이다.
인터넷 포탈에 워킹맘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퇴사, 독박육아, 나쁜 엄마, 죄책감이 딸려 나오는 지금의 현실이지만 부디 머지않은 시간에 이 모든 것들이 자동 검색당하지 않는,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은 매거진 <우리 문화>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