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리 Jan 25. 2022

로봇이 되지는 않았나요

말. 말. 말

 직장 생활을 15년 하다 보니, 이제 말하는 스타일만으로도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별이 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물론 '말'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말'이 그 사람의 품격과 교양을 보여주기는 합니다. 그렇기에 '말'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또 한편 나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회사는 '법인'으로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사람(人)이 모여 법으로 '인격'을 만들어 낸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처럼 생산활동도 하고 경제활동도 하면서 세금도 내는 집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업은 살아 숨 쉬는 인간과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흥망성쇠도 있고, 그 안에 성공도 실패도 있고, 즐거움도 행복도 있는.  


 가끔 회사 안에서 마치 로봇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마주합니다. 회사는 회사일뿐, 나란 고차원적인 인격을 담을 그릇이 못된다는 생각을 마주한 이들, 회사 안의 이런저런 둘레와 제약 고리타분함에 지친 이들이 결국 스스로 인격을 상실한 로봇으로 변신해버리고 맙니다. 이들은 구두보다는 이메일 보고, 전화보다는 메신저 채널을 선호하며, 사무적인 글로 자신을 꽁꽁 방어합니다. 사실 로봇이든 원숭이든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성과를 낸다면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 이긴 합니다. 


로봇은 입력값이 변수 A, B, C 정확할 때, 모든 선행 조건이 완벽할 때, 딱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아웃풋이 나오게 설계됩니다. 원숭이는 예측 불가한 변수가 너무 많아 입력값의 범위가 얼마나 넓어질지 가늠이 안됩니다. 더불어 아웃풋에 대해서도 전혀 예측 불가하다면 그만큼 리스크도 높아지는 셈이지요. 그러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은 정확한 인풋을 입력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보통의' 때론 '굉장한' 아웃풋을 내는 신기한 존재입니다. 



오늘 저는 '말'한마디에 '굉장한' 아웃풋을 내는 '인간'적인 회사원이 된 사람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주재 나와 처음 만난 상사는 디테일하게 모든 일을 챙기는 스타일의 리더였습니다. 무엇을 굉장히 애써서 만들어서 보고하면, 보고의 작은 디테일 또는 부수적인 것들까지 챙기면서 업무의 진전을 어렵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작은 일이라도 리더가 시키지 않으면 스스로 안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내가 알아서 하느니 상사가 시키면 그때 하지 뭐, 그게 일한 생색 내기도 좋을 테니' 상사가 하는 질문에 상사가 지시하는 일에 점점 영혼을 상실한 로봇처럼 대응하기 시작했지요. 로봇처럼 단순한 일, 디테일한 일에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젠 큰 그림을 그리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김 차장, 소수점은 둘째까지 하라니까 왜 첫째까지 찍었나. 김 차장, 표는 얇은 회색으로 그려야 보기가 좋아.' 상사와 저 사이에는 어떤 인간적인 케미도 인간적인 배려도 인간적인 호응도 없는 그냥 조련사와 반복된 행동만 반복하는 훈련된 강아지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로운 상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상사는 좀체 업무 지시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훈련을 기다리던 저는 아무 훈련도 하지 않고 방임하는 상사가 너무 어색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분은 '여러분은 주재를 나온 만큼 모두 팀장급입니다. 굳이 내가 하나하나 지시하지 않아도 각자 맡은 일의 책임자라고 생각하고 일해 주시고, 나는 잘 안 풀리는 일에 대해서만 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그분의 한마디는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내가 책임자라는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일의 마지노선이라는 마음이 들자 보고서는 다듬어지고, 날카로워지고, 통찰력이 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관련 부서의 협조가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사가 적극 나서서 싸워(?) 주시고 설득해주셨습니다. 전적으로 나의 시각, 나의 전략대로 믿으시고 밀어 부칠 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승진을 하시어 다른 자리로 이동하실 때의 마지막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이제껏 함께 일한 팀원 중에 최고였습니다.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저는 이분 밑에서 정말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엄청나게 몰두하면서 신나게 일했던 것 같습니다. 로봇 같았던 저는 드디어 마늘을 먹고 '인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어떤 후배는 참 말을 예쁘게 합니다. 월등한 업무 성과를 아직 내고 있지는 않지만, 곧 엄청난 아웃풋을 내는 '인간'적인 회사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배경은 이 후배는 용기가 있고 단단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업무적 실수를 덮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미안함'을 말할 줄 아는 용기, 개인사로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에도 타인에게 친절과 상냥함을 베푸는 용기, 부정적인 피드백에도 긍정으로 말하는 단단한 마음. 이런 것들은 이메일이나 메신저로는 교감하기 힘든 부분이며, 그의 말과 태도에서 아우라로 형성되는 인간적인 면모지요. 이런 이에게 더 '정'이 가고 '믿음'을 주고 싶어지는 것도 인지상정이고요. 


 

저는 배려와 믿음을 줄 수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적인 상사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리고 정해진 모듈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닌, 교감을 통해 소통하고 긍정의 메시지로 '굉장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인간'적인 후배들과 일을 하기를 꿈꿉니다. 긍정에 긍정으로 대답하기는 쉽습니다.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요. 그러나 부정에도 긍정으로 말할 수 있는 마음이 단단한 회사원이 되고 싶습니다. 

 

똑똑한 말에는 고개가 숙여지지만 배려와 믿음을 주는 말에는 마음이 숙여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이벌이 준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